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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윤공,부정공파현조

永嘉君 휘 奕과 諸子孫(종보 제445호 20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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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6-29 17:05 조회4,5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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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윤공파(佐尹公派) 14世 영가군(永嘉君) 휘 혁(奕)은 좌윤공(佐尹公)의 고손으로 젊어서 문장에 능하고 박학하여 국학생(國學生)으로서 고려(高麗) 충열왕 16년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중문지후(中門祗侯)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이르러 후손이 귀히 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안동시 북후면 오산리 제비원에 있으며 실묘(實墓)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가승에는 영가군의 표석이 침갑원에 있는데 흐려 심독할 수 없어 후손 장치(將治)가 개수하니 야성 송준필이 이르기를 오백여년이 흘러 생졸년대를 알 수 없으며 표덕(表德) 역시 미상이라 하였다.

아들 휘 용일(用一)은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후손이 귀히 되어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증직되고 희경공(僖敬公)으로 증시되었다. 묘소는 안동 제비원 선고묘 서쪽 언덕에 있고 실묘(實墓)이다.



사진1 판관공 철손 4대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포항시 연일읍 달전리)


문정공(文靖公) 희정(希正)

16世 휘 희정(希正)은 감찰(監察)을 지내고 영가군(永嘉君) 혁(奕)의 손자로서 3자 휘 진(軫)이 귀히 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에 증직되고 문정(文靖)의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안동시 정하동 고지곡에 있다.

후사는 7남 3녀를 두었으니 장자 휘 곡(轂)은 고려조에 판도판서를 거쳐 경산현령을 지내고 조선조에 벼슬을 버리고 예천 용궁의 대죽리에 우거하였다. 묘소는 예천 지보면 수월리 우갑산에 있다.

곡의 증손 한생(漢生)은 세종 30년 문과 급제하였다. 한생(漢生)의 고손 낙빈공(洛濱公) 진한(震翰)은 현종 4년 식년시 문과 장원급제하고 숙종 3년 병조정랑에 보임되었는데 한성에서 졸하니 순조 12년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2남 여도(輿道)는 관찰사를 지냈으나 무후하고 3남은 문경공 진(軫)이고, 4남 현감공 지(輊)는 개령현감을 지내고 예천 용문으로 이거하니 이후 자손이 세거하게 되었다.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내렸다. 묘소는 예천군 예천읍 산동리에 있다. 지(輊)의 5대손 대명(大鳴)은 선조 3년 식년시 진사로 급제하였다.

5남 헌(軒)은 현감을 지냈으나 무후하고 6남 송고공(松皐公) 초(軺)는 고려조에 문과급제하고 판재용감사를 지내고 조선조에 함길도 관찰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배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예천 용궁 대죽리로 이거하였다. 묘소는 예천군 지보면 신중리 염송산 피악곡에 있다.

7남 현령공 치(輜)는 흥원현령을 지내고 문과하여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종손 산해(山海)가 순절하니 연좌되어 문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묘소는 안동시 북후면 오산리 제비원에 있다.


문경공(文景公) 진(軫)


문경공 진 묘소(경기 광주시 남종면 삼성3리 458)

3남 진(軫)은 호는 경재(敬齋)이며 공민왕 6년에 출생하여 우왕 3년 진사로서 병과급제하였다. 남해안 의창에 왜구가 침입하자 현령으로 나아가 왜구를 격퇴하였다. 이무렵 이성계의 추천으로 전주판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오래도록 은둔하다가 태조 7년 왜구가 또 침입하자 경력(經歷)으로 출사하고 이어 강원도와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며 태종 7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같은 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세종 4년 66세에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사, 형조판서에 재배되고 세종 8년 찬성(贊成)에 오르고 세종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 75세에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경연 예문관 춘추관사를 겸하고 세자사부로 79세에 졸하니 임금은 조회를 폐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조곡하였다. 문경(文景)의 시호가 내렸으며 묘소는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삼성리 정승곡이다. 황희(黃喜)의 방촌실기에 공이 여진의 이만주 등 야인 수백호를 귀화시켰다고 하였다.

문경공 신도비와 묘비

퇴계 이황(李滉)이 공의 징청각(澄淸閣-영동)시와 객관운(客館韻-결성)을 보고 군자충군애국지심 불망수유지간(君子忠君愛國之心不忘須臾之間) 군자가

임금에 충신하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잠시도 잊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문경공(文景公) 진(軫)은 4남4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병사공 맹경(孟慶)이다. 세종 22년 첨지중추원사, 세종 29년 공조참판, 경상좌도절제사, 세종 32년 정조사가 되어 북경에 다녀오고 문종원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전라도 수군처치사가 되었다. 2자 맹도(孟度)는 군수를 지냈고 3자 맹정(孟貞)은 호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추증되었다. 4자 칠림(七臨)은 세종 5년 전시 문과 급제하여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칠림의 손 지상(志常)은 장원급제하고 평창군수를 지냈다. 자손들은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에 살고있다.

송고공(松皐公) 초(軺)의 아들은 관(寬)으로 조산대부 의금부 경력을 지냈으며 관의 아들은 죽림공 휘 산해(山海)이고 다음호에 소개한다.


판관공 철손(哲孫)과 자손들




사진2 판관공 철손의 단소(연일읍 달전리 도음재 후록)

죽림공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철조(哲祖), 차자는 철종(哲宗), 3자는선무랑 철명(哲命), 4자는 판관 철손(哲孫)인데 부친이 사육신화에 순절한 일로 금고형을 받고 경주로 와 세거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1854년 도음재(禱蔭齋)를 건립하였는데 판관공 20世 철손, 21世 보공부장 민, 22世 처사공 순경, 23世 사옹원 직장 량, 23世 천사부장 녕, 23世 장사랑 평의 4대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포항시 연일읍 달전리 452-1번지에 건립하고 도음재기는 동애 권헌조공이 지었다. 철손은 경주 국당의 입향조로서 도음재 후록에 단소를 설단하였다.


사진3 보공장군 휘 민의 묘소(선고 단소 우록)


철손의 아들은 보공장군(保功將軍) 휘 민(敏)이며 민의 묘소는 선고 우록에 있다. 손자는 빙고시(氷庫寺) 별제(別提) 순경(舜卿)이며 증손 영(寧)의 아들은 24世 복시(復始)인데 복시의 호는 구사재(九思齋)로서 명종 11년 출생하여 학행으로 봉직랑 사제감첨정(司帝監僉正)을 지내고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팔공산 회맹에 참가하고 창령 화왕산 곽재우의 휘하에서 싸웠으며 사적이 창의록(倡義錄)에 있다. 벼슬은 첨정에 이르렀으나 나아가지 안했다. 난이 평정되고 귀향하여 향당을 정화시켜 후학을 길렀다. 복시의 묘소는 포항시 기북면 관천리에 있으며 자손은 4남 1녀를 두었다. 공은 예양(禮讓)을 돈독히 하자고 선조 31년 상동계(上洞契)를 결성하였는데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려 적극 권장하였다. 공의 사후 인조 16년 서당과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철종 13년 화재로 소실되어 14년 중건 하였으며, 1923년 내외촌에 새로 지어 후손의 강학장소로 활용하였다.



사진4 24세 복시의 재사인 구사재(강동면 국당리444번지)


사진 5 구사재 내당

사진 6 복시의 묘소(포항시 기북면 관천리)




사진 10 구사재 이건기


복시의 장남 형(鎣)
은 호가 형강(兄江)이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명이 떨쳤다. 차남 약(鑰)은 음사로 내금위를 지냈고 6세손 휘 종락(琮洛)은 호가 갈산이고 풍도가 괴위(魁偉)하고 학문이 깊어 이름이 경향에 알려졌다. 정묘 갑인에 운곡서원(雲谷書院)창건에 진력하고 기유년에 상소하여 죽림선조를 신원 복작하고 신해년에 경기, 충청, 영남의 선비 2천여명의 선비들과 상소하니 죽림공에게 정려(旌閭)가 내리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의병활동도 하였으며 문집이 있고 예천 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11세손 휘 숙영(肅永)은 호가 국포이니 풍도가 영위하고 덕행을 겸비하니 세상의 의표라 하였다. 운곡서원 승변(僧變)시 백부와 같이 상소하여 정리하였고 계묘년에 운곡서원 유지에 설단하고 계해년 구사재(九思齋)를 창건하였으며 낭중공 단소 설단시 관여하였다. 3남은 감(鑒)이고 감의 10대손은 영태(永泰)이다.

순경(舜卿)의 3남은 장사랑 평(平)이며 경릉참봉을 지냈고 후사는 복흥(復興)을 두었는데 복흥은 충신 정려(旌閭)가 내리고 사림의 발의로 단계서당을 세웠는데 다음호에 소개한다.


사진 7 보은재(영재를 위한 재사(강동면 국당리 373


복시(復始)의 11대손 영재(永載)는 호가 보은(補隱)이고 1919년에 출생하여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학문에 힘쓰며 후학을 길렀다.

일제강점기 일본 만주 등에서 우거하며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가세를 극복하며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친족간 돈목하였다. 보은재(補隱齋)는 장남 권혁근이 선지를 받들어 국당리373번지에 5칸 겹집을 지었으며 동애 권현조공이 상량문을 지었다.


사진8 모첨재(영태를 위한 재사(국당리 444-1)




사진 11 보은재기(동애 권헌조 찬)


영태(永泰)는 병진 1916년 운곡서원 복원당시 감역을 하고 죽림선생 실기를 번역하였다. 구사재의 11대 주손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960년 구사재를 이건하고 죽림실기를 중간하고 말년에 삼익계(三益契)를 결성하여 시를 짓고 명승지를 장유(壯遊)하였다. 아들 권혁준이 선지를 받들어 1996년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444-1에 모첨재(茅簷齋)를 창건하였으며 상량문은 권헌조공이지었다. (자료제공 경주종친회, 감수 부총재 권영하, 편집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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