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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25] 民族音樂家 笑天 權泰浩先生 (종보 제381호 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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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30 13:58 조회4,9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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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25] 民族音樂家 笑天 權泰浩先生
民族音樂家 笑天 權泰浩선생
노래에 살고 노래에 죽은 여명기 음악계의 독보적인 성악가 겸 작곡가 소천(笑天) 권태호(權泰浩 1903~1972)선생은 동정공파 33세로 1903년 안동 에서 권중한(重漢)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처럼 민족을 생각한 예술인도 드물다. 전 국민이 애창하던 ‘나리 나리 개나리~(봄 나들이), 한때 대구사람 누구나가 부른 ‘능금노래’ 등이 선생의 곡이며 1927년 7월 대구에서 첫 독창회를 연 성악가이며 작곡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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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문단 초유의 상화 시비(詩碑)가 대구 달성공원에서 제막되던 1948년 3월14일 일본 유학파 성악가 권태호선생이 ‘상화 비문’을 주제로 곡을 지어 대구음악학원(大邱音樂學院) 생도들의 합창으로 들려주었다. 마치 상화 시인의 못다 부른 조국, 못다 찾은 땅의 한을 흐느껴 우는 듯한 곡조에 담은 느낌을 받았다고 이윤수씨는 밝혔다.

“권태호 선생님을 참 존경했습니다. 대단한 실력이었지요. 해방되고 제일예배당(현 대구제일교회 구교회)에서 해방경축음악회가 열렸는데 소천선생이 ‘낙화암’ 등을 독창하셨습니다. 하이 테너로 이태리식 벨칸토 창법과는 다른 독일식 창법으로 살짝 넘어갈 때는 정말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감격이 새롭습니다.”

해방 후 경주 현악사중주단 세컨드 바이올린 주자였던 천시권 전 경북대 총장은 선생의 성악가적 역량이 탁월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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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2 안익태 선탱과 함께(계성학교강당)

여명기 성악가로 큰 족적을 남긴 권태호선생은 해방직후(1948년) 대구시 중구 수도산자락에 대구음악학원을 차리고 음악학교로 격상시켜서 본격적인 음악인재를 양성하려던 목표를 가졌으나 꿈은 무산됐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적산가옥을 개조했던 대구음악학원은 미군 주둔지로 몰수당했다.

이미 1930년대 평양음악협회 창설을 주도할 정도로 음악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선생은 대구음악학원 창설 두해 전인 1946년 경주현악사중주단을 구성한 이의성을 주축으로 경주예술학원을 열어 경주문화협회 최윤 회장 등과 함께 경주예술학원 창립멤버가 됐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고,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이 터졌을 때의 일이다. 권태호선생은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개선가’를 작곡, 발표하여 왜경에 연행돼 옥고를 치렀다.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남달라 창씨 개명도 하지 않아 다들 ‘권상’이라고 불렀다. 권태호의 가슴 속에는 불의와 부정을 보면 역겨움을 느끼는 불덩이가 들어 있었다. 들고 다니던 지팡이로 역겨운 자들의 목을 대번에 낚아채기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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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2 안익태 선탱과 함께(계성학교강당)

1952년 어느 날 청마(유치환)와 석우(이윤수)가 술판을 벌였다. 소천은 열변을 토했다. “우리들은 무엇을 가져야 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간 본질적인 정신이 필요할 뿐이다. ‘도선불여악’(徒善不如惡)이라 했으니 선을 가지고도 행하지 못한다면 그 선은 무엇에 쓸 것인가” 선을 가지고도 쓰지 않는 그것이 바로 위선이요, 곧 악이라고 강조한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았다.


진군가로 장병의 사기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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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7.2 대구소학교 대강당에서 속창회

경북 안동 율세동 13번지에서 권중한(權重漢)과 김귀행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소천 권태호 선생은 동정공파 33세로 안동 보통학교를 졸업(1917년)하고, 1923년 윤옥선여사와 결혼한후 아내를 남겨둔 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5년 아오야마(靑山)에서 중학교 속성부(야간)를 졸업하고 그해 3월 일본고등음악학교에 합격했다.

유학시절 장남 영건(寧建-육군소령, 영어교사)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1927년 7월2일 대구소학교 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대구 최초의 독창회이다. 1928년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면서 히비야 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 독창회에서 권태호선생은 네 번이나 앙코르 곡을 불러야 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5월12일에는 서울기독청년회관(YMCA)에서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로 독창회를 가졌다. 독일 예술가곡을 국내에 처음 알린 무대였다. 선생은 1930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숭실전문학교에 재직하면서 경성방송국의 개국과 함께 매주 1회 고전음악프로를 담당하였고, 1932년에는 평양음악협회 창립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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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경성방송국에서 숭전합창단(앞줄 우측)

동경에서 제3회 독창회를 메이지 청년회관에서 연 권태호선생은 1944년 모교인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초빙돼 해방 전 2년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교수직을 맡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다시 외국으로 가려 했으나 선생과 함께 비자를 신청했던 안익태선생은 독일로 떠났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6.25 전쟁 중에 국군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데~"로 시작되는 ‘승리의 노래’를 비롯하여 ‘호국의 노래’ 등 500여 곡을 지었다. 국민가요를 통해 진취적인 기상을 심으려 애썼다. 그러한 공로로 1963년 제1회 경북문화상(음악부문)과 공로표창을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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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중앙교회 찬양대(중간열 우측)

선생의 고향인 안동에서는 소천 권태호 선생 노래비 및 기념관추진위원회(위원장 정진호, 봉사자 사진작가 윤종호)가 지난 6월 기념음악회를 열면서 ‘잊혀진 권태호를 되살리자’며 운동을 시작했으나 정작 활동의 본거지인 대구에서는 세미나에서 언급되었을 뿐, 본격적인 추모사업은 가동되지 않고 있다. 평생 46번이나 이사를 하는 빈한함 속에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다보니 진정한 제자를 키우지 못한 게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의 추진을 더디게 하는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안동에서 선생을 기리는 음악회와 “소천음악회관”을 건립코자 2006.3. [소천선생사업후원회] 權寧佑회장과 동정공파 權度爀종회장등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머지않아 빛 볼 날이 오리라 믿으며 권문의 자랑인 민족음악가 권태호선생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족친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야겠다.

<자료:매일신문 인용>
<사진 기사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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