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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19 ] 서부영남 安分堂 權逵先生의 精神思想 (종보 제374호 200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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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190회 작성일 12-04-3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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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19 ] 서부영남 安分堂 權逵先生의 精神思想
경남 산청지방에 복야공파13세 문탄공(文坦公) 휘 한공(漢功)의 5대손 휘 계우(繼祐)의 자손들이 모두 영달하여 단성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양산군사를 지낸 촌(忖)의 아들인 계우는 진사에 합격하여 사용(司勇)을 지냈으며 판중추부사를 지낸 윤변(尹汴)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향인 단성현 단계리로 옮겨살면서 자손들은 일대에서 세(勢)를 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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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괴정 :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안분당선생의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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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공의 장남 금석(金錫)은 진사에 합격하고 전옥서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4남3녀를 두었으니 첫째는 삼괴당(三槐堂)시민(時敏)이고 둘째는 시주(時柱)이며 셋째가 내금위 사직을 지낸 시득(時得)이다. 넷째는 시준(時準)이며 시준의 증손 동계공 휘 도(東溪公 濤)는 차후 상세히 논술할 계획이다.

문탄공(文坦公)은 고려 충선왕 3년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고 추성동덕협찬공신,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도첨의우정승으로서 예천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사후에 문탄(文坦)의 시호를 받았다.

문탄공의 장남 충헌공(忠憲公) 휘 중달(仲達)은 추성정책안사공신 삼중대광밀직사사(三重大匡密直司事)에 이르고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졌다. 차남 문절공(文節公) 휘 중화(仲和)는 문하찬성사에 이르고 태종7년 영의정(領議政)으로 예천백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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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강정사 : 안분당 휘 규의 재사(입석리)

安分堂의 學文思想과 文山書院

시득(時得)은 장남 우(遇) 차남 수(遂) 3남 안분당(安分堂) 휘 규(逵) 4남 준(遵)을 두었으며 안분당은 장남 문현(文顯) 둘째 문저(文著) 셋째 문임(文任) 넷째 문언(文彦)을 두었는데 문저는 중부 수(遂)에 출계하였다.

권규(權逵)선생은 자는 자유(子由)이고 호는 안분당(安分堂)으로 1496년 단계에서 출생하여 21세에 정몽주의 현손인 정완의 딸을 맞아 내원당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현손 황(鎤)이 입석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안분당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선생은 7세때 소학, 11세에 대학을 배우고 19세에 정주(程子, 朱子)의 성리학(性理學)을 갈파하였다. 31세 되든 해에 퇴계(退溪)가 찾아와서 서로 경서(經書)를 강론하였으며 의령으로 퇴계를 찾아가 강론하고 시(詩) 교류를 하는 등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한편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부친이 졸하자 안분당은 조식(曺植)을 찾아 조문하였고 아들 문임(文任)을 남명문하에서 배우도록 하였다.

선생은 38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40세에 원당동에서 집을 짓고 안분당(安分堂)이라 편액을 걸었다. 51세에 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53세에 졸하니 남명(南冥)이 와서 입석리 뒷산에 묘지를 잡아주었으며 선생은 초야에서 학문이 높아 이황(李滉) 조식(曺植)등 대가들이 찾아와 도의지교를 맺는 등 그 명성은 널리 알려져 온 나라에 모르는 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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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분당선생을 모신 사당 유허사 (사월리 쌍괴정 내)

안분당 사후 276년이 지나 헌종10년 사림(士林)의 발의로 문산서원(文山書院)을 세워 선생의 제2자 문임(文任)과 함께 배향하였는데 20년만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선생은 사월리 내원 뜰에 훼나무를 심고 자손들 중에 잘되는 자 있으리라 하였는데 현달한 후손들이 많이 나왔다.



삼연재 : 안분당의 증손 극태의 재사(사월리, 좌측이 쌍괴정)



1942년 후손이 이 자리에 쌍괴정(雙槐亭)을 세우고 후원에 유허사(遺虛祠)를 지어 다례(茶禮)로 옛 문산서원의 전례(典禮)를 행하면서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오지영(吳智永)이 지었다. 한편 묘소가 있는 재경동에 경강정사(敬岡精舍)가 있고 쌍괴정 옆에는 삼연재(三然齋)가 나란히 있는데 24세 이암 극태(彛菴 克泰)를 위한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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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리에있는 안분당유허비 입석리에있는 안분당 유적비

안분당이 남긴 시문(詩文)과 행적(行蹟)은 정유재란에 모두 불타버렸는데 6세손 퇴암공 중도(退菴公 重道)가 자료를 수집하여 가전실록(家傳實錄)을 지었으며 길(佶)과 흔(俒)이 「안분당실기 安分堂實記」를 편찬하고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 등 여러 문(文)을 추가하였으며 호명(顥明)이 안분당실기 서문을 짖고 원당집(源塘集)을 합본하고 재규(在奎)가 발문을 붙여 1882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하니 비로소 안분당(安分堂)의 학덕(學德)과 사상(思想)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安分堂의 賢孫들과 遺蹟

안분당의 장자 문현의 장남 제(濟)는 식년시 문과병과에 급제하여 고부군수를 지냈고 임진난과 정유재란에 곽재우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출계한 제2자 문저(文著)의 아들 심(深)은 남명의 학통을 이었으며 임난에 의병을 일으켰다. 문저(文著)의 손 극평(克平)은 정읍의 모충사에 배향되었고 극행(克行)은 성균생원으로 임난에 창의(倡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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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추재 : 24세 극익, 장남 성, 손 덕계, 종손 중항을 위한 재

안분당의 제3자 문임(文任)은 식년시 진사2등과 선조9년 식년시 병과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이르렀고 문임의 계자 강은 효행이 지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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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분당 현손 황이 건립한 문산서당(입석리 중촌)

강의 장자 극형(克亨)은 극태(克泰의) 제2자 황(鎤)을 계자로 삼았는데 양전처사(陽田處士) 황(鎤)은 헌종12년 문산서당(文山書堂)을 지어 수백권의 책을 비치하고 후학을 학습토록 하였다. 여기에 원근의 유림들이 찾아와 론학(論學)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때 읊은 시(詩)를 모은 문산재창수록(文山齋唱酉州 錄)있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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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재 : 28세 경모재공의 자, 손을 위한 재사 (경추재 아래)

강의 제3자 극익(克益)은 4남4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성(鋮)과 손 덕계(德扌癸 ) 종손 중항(重恒)등 4대조를 위한 재실로서 1826년 29世 도일(道一) 삼묵(三墨)공이 문계기사록(門稧記事錄)을 짓고 경추재(敬楸齋)를 건립하였으며

삼묵재공의 증손 32世 성균진사 재규(在奎)공이 기문을 추가하였다. 경추재는 단성의 구인동에 있으며 경추재 아래에는 염수재(念修齋)가있는데 염수재는 28世 경모재공(敬慕齋) 길(佶)의 아들 득일(得一) 도일(道一) 문일(文一)과 손자 호명(顥명)을 위하여 34세 재경(載敬)이 추진하여 건립하므로서 경추재와 함께 선조님의 유덕을 기리고 경조효친(敬祖孝親)의 의표로 삼고 있다.

경모재공 길(佶)은 동몽교관으로서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고 호명(顥明)은 문장과 문필이 뛰어나 인옥(人玉) 문옥(文玉) 필옥(筆玉)의 삼옥으로 회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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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강씨 정려각(입석리)

안분당의 제4자 문언(文彦)의 아들 택(澤)은 선무랑(宣武郞)이며 배위 진양강씨는 정유재란에 절개를 지켜 순절하므로서 정려(旌閭)를 받았으니 입석리 중심가에 려각(閭閣)과 기문(記文)은 지나는 이를 숙연케 하고 있다.

문언의 제3자는 함(涵)이고 함의 계자는 극태(克泰)이며 극태는 5자를 두었는데 제2자는 전술한 황(鎤)이고 제3자는 상(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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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분당 현손 상을 위한 서당(입석리)

입석리에 있는 자암서당(紫岩書堂)은 안분당의 현손인 상(鋿)을 위한 집으로서 손 퇴암공(退菴公) 중도(重道와 상철(相喆)이 후손들을 위해 서숙으로 세웠으며 최근까지 한문을 공부하였다. 이렇듯 안분당 후손들은 안분당의 유지를 받들어 후학계도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1621년부터 80여년간 단성향안(丹城鄕案)에 오른 인물중 권문이 68인이고 그중 23인이 안분당 후손이다.

시천면 원리에 있는 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을 배향한 곳인데 오문(吾門)에서는 중도(重道) 중만(重萬) 성락(成洛) 흔(俒) 호명(顥明) 덕명(德明) 헌정(憲貞) 재규(在奎)등이 원임을 지냈으며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에 오른 남명의 문인으로는 권문임(權文任) 문현(文顯) 문언(文彦) 문저(文著) 형제와 문현의 아들 제(濟)가 올라있다. 권중도(重道)는 덕천서원 경의당 중수시 중수기를 지었고 권헌정은 남명집(南冥集)을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였다.



단성일대에는 안분당(安分堂)의 숨결이 살아있는 듯 곳곳에 유적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1988년 현재 산청문화원장인 권영달(權寧達)과 상현(尙鉉)이 연민 이가원(淵民 李家源)에게 요청하여 비문을 받고 영집(寧執), 진경(震慶), 재달(載達), 민호(玟鎬) 등 여러 일족의 힘을 모아 경강정사(敬岡精舍) 옆에 안분당의 유적비(遺蹟碑)를 세웠다. 이 유적비는 안분당의 학덕을 선양하고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높혀 안분당 같은 현달한 후손들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상징 비이기도 하다.


< 기사 사진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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