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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7 ]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청성서원(靑城書院)(종보 제353호 200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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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978회 작성일 12-04-3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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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7 ]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청성서원(靑城書院)
퇴계의 제자들 중 서애 유성룡 등은 첫 번째 부류이고 송암 권호문은 두 번째 경우다. 송암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서 오직 후학들 가르침에 힘썼으니 유성룡은 선생을 “백세사(百世師)”라고 평한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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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서원 본당 /경북 안동 풍산읍 막곡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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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서원 전경]



송암 권호문 선생은 복야공(僕射公) 11世孫으로 윤평계(允平系) 중랑장 후(厚)의 현손 육의 둘째아들로 1532년 출생하였다.

공은 이퇴계(李退溪)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동료의 추앙을 받았다.

30세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이시기에 부친과 모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시묘(侍墓)를 하다보니 벼슬길에 나아갈 시기를 잃게 되어 포기하고 안동의 청성산 기슭에 우거하였다. 만년에 접어들면서 덕망과 학식이 더욱 높아져 도처에서 찾아오는 후학들이 끊이지 않았다.



시대상황(時代狀況)

서기 1500년대는 사림(士林)에게는 시련과 영광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이후 중종(中宗)반정으로 사림의 뜻을 펴는가 했더니 간신들에 의한 기묘사화가 있었고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간신들 싸움에 사림들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은 다시 힘을 얻어 정계를 장악하지만 명분과 실리에 따라 동서로 분당된다.



이러한 난세에 선비들은 세 가지 행로를 걷는다. 하나는 수기치인(修己治人) 과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정치일선에 나서는 선비들이고, 둘은 초야(草野)에서 덕을 닦으며 후진양성에 몰두하는 선비들이고, 셋은 초야에 뭋쳐있다가 천거되어 정치에 나서는 선비들이다.

퇴계의 제자들 중 서애 유성룡 등은 첫 번째 부류이고 송암 권호문은 두 번째 경우다. 송암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서 오직 후학들 가르침에 힘썼으니 유성룡은 선생을 “백세사(百世師)”라고 평한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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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헌]

모여든 제생(諸生)이 넘쳐 서당을 짖고 또 짖다.

송암선생은 15세부터 퇴계(退溪)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약관 20세에 집의 남쪽 봉우리에 한서재(寒棲齋)를 짖고 송암(松巖)이라 이름 하였는데 새벽에 일어나 송(宋)나라 뭇 현인(賢人)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기상을 본받으려 하였다. 30세에 진사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부터 문하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35세에 연어헌(鳶魚軒)이 낙성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선생의 이름이 세상에 떨치니 원근 각처에서 제생들이 몰려와 수용키 어려 38세에 경광서당(鏡光書堂)을 크게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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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물당 / 안동시 서후면 교리]

그리고 관물당(官物堂)을 낙성하였는데 선생은 리(理)가 천지의 근본이 되고 천지가 만물의 근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여 관물당 기문을 지었다.



42세에 청성정사(靑城精舍)를 짖고 48세에 서애 유성룡이 선생과 함께 가르치기를 청하여 병산서당(屛山書堂)에서 강회(講會)를 하였다. 53세에 폐찰인 성산암을 중수하여 서당을 만들고 앞서 낙성한 각 서당에서 강론(講論)하기를 즐겨하였다.

이토록 송암선생은 오직 후학교육에 열중하면서 누차 입신의 기회를 사절하고 독락팔곡(獨樂八曲), 한서십팔곡(閑居十八曲) 등 한시 1,700여수를 남겼으니 분류하면 후학들에게 정진하기를 당부하는 권학시(勸學詩),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며 절개를 지키는 존현시(尊賢詩), 성리학의 세계관을 시로 노래하는 설리시(說理詩), 산수를 사랑하는 천석고황시(泉石膏肓詩), 초야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한거자락시(閑居自樂詩)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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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판]

송암선생은 난세에 초야에서 후진들을 지도하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덕을 닦아 안자(顔子)의 삶을 본받아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깨끗한 삶을 살아온 백세의 스승이었다.




청성서원은 문인 송암 권호문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위해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선조 41년 문하생과 사림의 발의로 서원을 창건하였다가 막곡리로 이건하였다. 서원은 경내에 서원본당, 동재와 서재, 정도문(正道門), 그리고 선생을 배향하는 청풍사가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33호로 지정되어있다. 서원내 보관된 송암문집 목각판은 현재 안동시 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있다. 연어헌은 막곡리 남쪽 낙동강변에 있으며, 종택인 만물당은 서후면 교리에 있다.



<賢奉 權景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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