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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根公, 江華公, 忠愍公, 上洛君의 忠節 (종보 제442호 20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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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179회 작성일 12-04-20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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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根公 휘 僑
경기도 양근군수를 지낸 휘 교(僑)는 양촌(陽村)선생의 증손이며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예문관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지제(止齋) 문경공(文景公)의 손이며 연천현감을 지내고 이조판서로 증직된 연천공(漣川公) 휘 마의 차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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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양근공 종중재실(소흘읍 고모리33)

공은 성종 3년 사마(司馬)양장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다. 성종 15년 충의위(忠義衛)의 무산관으로 수리도감 단청 감역에 있었으며 성종 16년 관직에 올라 진주판관을 지내고 양근군수에 보임되었으나 파직되었다. 손자인 강정공(康定公) 철(轍)은 묘지문에 공은 성품이 정도를 지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직책에 있어 조금도 진루(塵陋)함이 없어 행실이 남부끄러울 바 없었으나 세속을 따라 아부하지 못 하여 관직이 현달치 못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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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양근공 휘 교 신도비(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33)

공은 영평현령으로 나갔다가 사직하고 돌아와 질환으로 집에서 졸하니 향년 73세였다. 영의정(領議政) 철(轍)이 귀히 되니 의정부(議政府)좌찬성(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세자이사(世子貳師)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하성동 주엽산 사허곡(寺虛谷) 서록(西麓)에 있으며 문중은 하성동에 재사를 건립하고 주엽산 입구에 공의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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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양근공 묘소(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하성동 주엽산 사허곡 서록)

공은 5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강화공 적(勣), 차자는 군수 감(勘), 3자는 해주목사 훈(勛)으로 5촌 당숙 칭(偁)에 출계하였다. 4자는 충주판관 소(劭), 5자는 별제공 칙(勑)이고 사위는 남세언이다.

江華公 휘 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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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강화공 휘 적 묘소 (고모리 주엽산 선고 좌록)

성종 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정성근(鄭成謹)의 문인으로 연산군 7년 32세에 부사과로서 식년시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연산군 10년 의금부 도사로 나가고 중종 2년 선전관(宣傳官), 사헌부 감찰(監察), 형조좌랑, 안동부 판관, 한성부 참군, 형조정랑, 안산군수를 거쳐 중종 19년 순천부사, 를 역임하였다. 부친상을 당해 복상을 하고 한성부 서윤(庶尹)을 거쳐 강화부사(江華府使)겸 진병마동첨절제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으나 중종 24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무리들에게 비타협으로 파직되었다. 공은 중종 26년에 62세로 졸하니 소흘읍 주엽산 선고 좌록에 장사하였다. 졸후 45년 후 차자 강정공(康定公)이 의정부에 입조하니 대광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領議政)겸 영경연 관상감사(領經筵觀象監事)로 증직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이 묘갈명을 짓고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가 글을 쓰고 참판 김난상이 전서하였으며 영의정 장유(張維)가 비문을 지었다.
아들은 증 좌찬성 지(軹), 영의정 철(轍), 지, 헌(軒)과 3녀가 있다.

지(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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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찰방공 휘 지 묘소(주엽산 조부묘 우록)

강화공의 장자로 중종 23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중직대부 중림도찰방(中直大夫 重林道察訪)이 되었다. 중종 35년 공조판서 윤임의 천거를 받았다고 하며 후에 증손 진(縉)이 귀히 됨에 따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소흘읍 고모리 조부 양근공 우록에 있다.
후사는 장남 충민공 종(悰), 차남 군수를 지낸 유(愉), 판관공 열(悅)이고 3녀를 두었다. 판관공은 금산 신안리 화원동에 은거하던 중 왜란이 일어나자 신안사 승려들과 의병을 일으켜 천내강에서 충민공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보고되지 않아 포증도 받지 못하였다. 배위 전주이씨도 함께 순사하였는데 숙종 8년 화원동에 설단하였다가 2000년 부리면 선원리로 천봉하고 원광대 조두현 교수가 단비문을 지었다.

忠愍公 휘 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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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충민공 휘 종의 정려(포첨시 고모리)

공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개령현감을 지냈으며 선조 25년 금산군수로 전보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내 각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니 이지시 백광언 등이 호응하여 전주에서 회합을 갔고 공주목사 허욱, 여산현감 고경조 등으로부터 군량을 지원받기로 하였다. 공은 관하 부대를 거느리고 방백(方伯)을 좆아 전주에 당도하니 관찰사 이광은 공이 연로하다고 군대를 모두 빼앗아 조방(助防)의 진에 이속시켰다. 공은 통곡하고 여산으로 와서 군량 운반을 독려코자 하는데 왜적이 옥천에 들어오니 방어사(防禦使)는 진안에서 김제로 달아나고 순찰사(巡察使)는 전주에서 남원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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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충민공 교지(증 이조판서 증시 충민)

공은 군관에게 말하기를 “왜적이 전라도를 침략할 텐데 방백은 도피하고 열읍(列邑)이 비어 사람이 없다. 내가 공간(公幹)으로 있으니 비록 군이 적에게 함락되어도 버리고 존망(存亡)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감히 할 수 없는 바이니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라 말하고 다음날 금산에 돌아와 군졸을 모집하니 2백이 되지 못했다. 제원 찰방 이극경이 역졸 약간을 데리고 와 천내강안 저곡산에 진영을 갖추고 고경명, 조헌 두 의병장에게 격서를 보내 힘을 합하기로 하였다. 6월 22일 왜장 소조천융경이 1만5천으로 공격하니 아군은 시석(矢石)을 빗발같이 날려 적을 살상하면서 저지하였다. 오후에 군은 역진기갈(力盡氣竭)하고 이극경이 먼저 전사하고 공도 아우 열(悅)과 아들 준(晙)과 함께 장열히 전사하였다. 적은 야음을 틈타 도강하여 고을을 함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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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충민공 휘 종의 묘소(소흘읍 고모리 양근공 묘소 우록)

고을 사람들이 부자의 시신을 거두어 빈장하였으며 다음해 장자 형 등이 포천 선영 양근공 우록에 귀장하였다. 순찰사 이정암과 검찰사 이산보가 도내 1인의 충분순절자(忠憤殉節者)라 하였고 이항복은 당세 제일의 장수를 잃었다고 탄식하였다. 선조 38년 선무원종공신1등에 책훈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겸 知經筵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가증되었다. 숙종 36년 정려가 내리고 숙종 37년 충민(忠愍)으로 시호가 내렸다. 고종 15년 제원의 천내천 저곡산 아래 순절 유허비가 서고 경연 이현조가 시장(諡狀)을 썻고 우찬성 이승보가 순절비문(殉節碑文)을 지었으며 유림의 박찬만이 비각창건기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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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23세 현의 묘소(소흘읍 고모리 새능골)

공의 후사는 현(晛), 춘(春), 경(暻), 준(晙)을 두었으며 현(晛)은 명종 9년에 출생하여 부친의 훈음(勳蔭)으로 장사랑 공릉참봉으로 제수되었으며 역병으로 41세에 졸하니 고모2리 새능골에 장사하였다. 미수 허목(許穆)이 비문을 썼다. 사후 장자 수은공 진이 귀히 됨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차자 춘(春)은 무주읍지에 천품(天稟)은 그릇을 헤아릴 수 없고 풍채가 장중하였으며 임난에 충민공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 순사하였다고 하였다. 3자 경(暻)은 선조 30년 정유재란에 황해도 연안에서 순찰사 이정완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4자 준(晙)은 천내천 전투에서 부친과 전사하였다.
현(晛)은 진(縉), 채(綵), 담, 서(緖)와 1녀를 두었다.

上洛君 휘 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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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락군 휘 진 영정

선조 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선조 30년 성균관 생원으로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난시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훈되고 광해 5년 효충분의익사공신에 봉해졌다. 선조 31년 시강원 정언(正言), 32년 병조좌랑(兵曹佐郞), 선조 33년 홍문관 수찬(修撰), 사헌부 장령(掌令),집의(執義), 광해군 1년 경주부윤(慶州府尹), 광해군 3년 양양 부사(府使), 5년에 승지(承旨), 7년 도승지(都承旨), 광해군 8년 수원부사(水原府使), 광해군 9년 함경감사(監司)로 왕을 면대하면서 비변책(備邊策)을 논의하였다. 광해군 13년 상락군에 봉해지고 영건도감의 제조(提調)가 되고 이어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이어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고 14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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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상락군 휘 진 묘소(소흘읍 주엽산 선영 남쪽)

공은 광해 5년 계축옥사에 인목대비 동생 김선의 사형 감형을 호소했으며 권신 이이첨에게 편당치 않은 일로 탄핵, 삭직되고 외직으로 좌천 등을 당하였으며 인조 반정이 일어 병조판서로 대궐에 입직하여 명을 기다렸다. 반정 핵심인 김류의 천거로 반정을 성공시켜 병판을 유지 되였지만 반정공신의 질시로 무고가 있어 파직되어 경남 양산에 유배되었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배소에서 살해되었으니 향년 53세였다. 묘소는 선영 남쪽에 있으며 미수 허목이 묘비문을 지었다. 종택에 영정이 있다.
인조 13년 신원(伸寃)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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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양근공, 강화공, 충민공, 상락군 가승(소흘읍 고모리 권순암씨 소장)

공의 후사는 감사공(監司公) 수(脩)로서 생부는 숙부 담이다. 광해 10년에 출생하여 인조 24년 식년시 생원으로 입격하고 현종 6년 정시문과 을과에서 급제하였다. 숙종 4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고 이어서 황해감사로 나갔다. 숙종 10년 67세로 졸하니 묘소는 풍덕 두문리이고 이익이 비문을 짓고 이관징이 글을 썼다. 수찬 권부가 행장을 지었다. <감수 권순암,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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