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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공파 현조

摠制公 諱 踐과 諸 子孫 (종보 제437호 20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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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20 21:55 조회5,7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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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공 휘 천(踐)은 현조가 첨의정승(僉議政丞) 대제학(大提學)을 지내신 국재(菊齋)문정공(文正公)이고 증조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검교문화시중(檢校門下侍中)을 지낸 충정공(忠靖公)이며 조부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낸 정간공(靖簡公) 희(僖)이며 부친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대제학(大提學) 문충공(文忠公) 근(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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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총제공 휘 천의 묘소(충주시 금릉동 산13번지)

공은 태종 6년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감찰(監察)을 지냈다. 19세손 영창(榮昶)이 지은 총제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문충공이 서도에 종군할 때 지은 총제공 ‘천을 생각하며’란 시에 “천아 네 절간에 있으면서 지금은 얼마나 자랐느냐 3년동안 보지못 하였는데 언제 돌아오겠니.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랄뿐이지 어찌 높은 관직에 오르기를 바랄 뿐이랴 .. ” 라 하였다. 숙부 매헌공(梅軒公)이 공이 완산지방관으로 나갈 때 송별 시(詩)에 “조카는 일 처리할 재능이 있으니 집안의 명성 떨침을 치하하네 수령(守令)으로서 험악한 풍습 교화시키는 은택을 베풀겠지만 관리의 비행과 기강을 바로 잡는 사헌부에서 이미 이름 드러났네”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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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공 재사와 신도비 금릉동 산13번지]

태종 11년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퇴폐한 풍속을 바로 잡고 누명을 풀어 주었으므로 모든 관료들이 질서가 정연하였으며 태종 17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이르러 종묘제례 물품을 전담하였다. 세종 1년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영의정 성석린의 독곡집에 공이 평안도 성천부사로 나가는 중에 8개 고을에 유애비(遺愛碑)가 섰다고 한다. 가전기(家傳記)에 공은 완산 부윤으로 흉년에 관곡을 풀어 백성을 구휼(救恤)하였으며 나주읍지에 의하면 세종 5년 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하였다. 그 외 선천과 부평도호부사를 역임하였음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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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공 신도비]

세종 7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지내고 공은 세종 11년 탄핵을 받고 제천으로 부처되었는데 아우 문경공 제(踶)가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상소(上疏)하여 집안 사정이 빈한하며 병고에 있기 때문이라 하며 이는 자신의 책임이 더 무겁다고 열거하니 임금은 경기지역으로 이배하고 이듬해 석방되었다. 공은 장례원 도관(都官)으로 있을 때 원주목에 있는 경순왕의 사당 경천묘(敬天廟)를 창건하였는데 조부 정간공은 시조 태사공께서 신라에 단성(丹誠-충성)했던 바를 생각하여 목은 이색(李穡)과 운곡 원천석(元天錫)과 의론하여 양촌(陽村)에게 명하니 양촌이 장자인 공으로 하여금 실행케 하니 경순왕(敬順王)의 최초 사당은 우리 안동(安東)권문(權門)에서 이룬 것이다. 1409년 봄에 부친상을 당하니 불교의식과 주자가례에 따라 엄숙히 하였다. 공은 평소 품성이 돈후(敦厚)하여 효우(孝友)하였지만 말년에 가묘를 못할 정도로 빈궁하였다.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筆苑雜記)와 해동잡록에 공은 매서(妹壻) 이종선(李種善)에게 “그대는 목은의 아들로 문장이 부족하고 나는 양촌의 아들로 문명이 미치지 못하니 그대와 내가 등하불명계(燈下不明契)를 조직해야 겠다”고 하여 세인을 웃겼다는 일화가 있다. 공은 세종 13년 졸하니 묘소는 광주의 추령에 있었는데 1985년 충주시 금릉동 산 13번지로 이장 합폄하였다.
총제공은 4남2여를 두었는데 장남 첩(睫)은 첨지중추부사로서 세조 1년 호군으로 좌익원종공신3등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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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길창군 휘 첨의 묘소(충주시 수정동 재궁현)]

차남 길창군(吉昌君) 첨(瞻)은 태종 2년에 출생하여 영춘현감 겸 권농병마단련판관(勸農兵馬團練判官)을 지내고 아들 양정공이 귀히 됨에 따라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추증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젔으며 성종 16년 84세로 졸하니 충주시 수청동 재궁현에 장사하였다.
삼남 참의공(參議公) 미(眉)는 세종 22년 천녕현감에 부임하고 문종 원년 광주판관, 세조 원년 좌익원종공신3등에 녹훈되었다. 그후 예천의 용궁현감과 영월군수를 지내고 부평부사, 이천부사를 거쳐 이조참의를 지냈다.
4남 목(睦)은 충좌위호군(忠佐衛護軍)을 지냈다.

摠制公의 孫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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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창군 휘 첨 묘정비(좌)와 양정공 휘 언 묘정비(우)]

첩(睫)의 아들은 길천군(吉川君) 환(懽)으로 가선대부 전라도수군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이며 세조 원년 좌익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세조 2년 대호군(大護軍)으로 함길도에 파견되고 세조 4년 병조참의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세조 7년 2월 경상우도처치사에 이어 3월 도호부사(都護府使), 6월에 전라도수군처치사를 하였다.
길창군(吉昌君) 첨(瞻)의 아들은 언(身匽 ) 과 체(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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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양정공 휘 언 묘소(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가좌동)]

양정공(襄靖公) 언(身匽 )은 세종 3년에 출생하여 단종 1년 모화관(慕華館)의 친시무과(親試武科)에 장원하였다. 계유정난 참여로 추충정난공신 3등을 받고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세조를 호위하였다. 세조 2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세조 5년 공조참의(工曹參議), 세조 6년 충청도처치사, 세조 8년 상호군(上護軍), 12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복성군(福城君)이 되었으며 진위사(陳慰使)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충청도 절제사(節制使)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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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공 부조묘(충주시 금릉동 능암)]

세조 13년 49세에 병환으로 졸하니 졸기에 무략(武略)이 있고 말이 적으며 미소짓는 사람이라 하였다. 시호를 양정(襄靖)으로 하고 부조묘(不祧廟)를 내리니 충주시 금릉동 능암에 있다. 묘정비에는 행 병조판서(兵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제수되었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묘소는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가좌동에 합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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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공 부조묘 홍삼문]

양정공실록에 노산군(단종)이 경회루에 나아가 여러 생도들에게 책문하였다. “요(堯)임금은 띠로 이은 지붕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고 석가래를 대패질 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마시면서도 임금의 힘을 알지 못하였으며 교화(敎化)가 넓고 높아도 알지 못하였다. 순(舜)임금이 계승하여 아홉가지 질서가 잡히고 그 덕의 밝고 높음을 상상할만하다. 우(禹)임금은 더러운 궁전에 살며 거친 옷을 입고, 은(殷)나라의 삼종(三宗)은 농사짓는 소민의 고생을 알았고 주(周)나라의 문왕은 백성을 자식처럼 보았으니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정치가 융성하였다고 하겠다.... 우리 조종께서는 충(忠)과 신(信)으로 나라를 세우고 근검으로 정치를 하였다. 내가 나이 어려 이어 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탄식함이 많을 것이다. 말한다면 토목(土木)의 역사가 그치지 않고 공부(貢賦)를 부과함이 지나치게 많다. 이를 어찌 처리하면 좋을 것인가? 그대들은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을 강구하여 나의 정치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모화관에서 권언(權躽)등 40인을 뽑았다. 또 단종은 권언에게 하교하기를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것은 신하의 대의요 공을 갚아 상을 행하는 것은 국가의 영전(令典)이다. 너의 원조(遠祖)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일하였고 증조가 우리 태종(太宗)을 도와 공훈을 세워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고 네게 이르러서는 더욱 충정을 두텁게 하였다. 네가 무과(武科)에 으뜸으로 뽑혔으니 내 마음 기뻐서 의지할 간성으로 삼아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였다. 네 공과 충성을 만세에 길이 힘입어 잊지 못한다. 더욱 충성을 다하여 왕실을 호위하라” 하였다.

목사공(牧使公) 체(軆)는 세종 16년 출생하여 세조 9년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호패 규찰을 위해 지방에 파견되고 세조 12년 별시무과(別試武科) 춘시에 도사(都事)로 급제하였다. 성종 6년 성주목사로 나가 연산군 9년 졸하였다.
참의공 미(眉)의 장자 박(忄專 )은 縣令이고 차자 척은 사정(司正)이며 3자 변(忭)은 원종공신으로 강릉부사를 지내고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목(睦)의 아들 열(悅)은 사육신 이후 광주로 운둔하여 신숙주 아우 신말주와 선교(善交)하며 산수와 시주(詩酒)를 벗하고 지냈다.
<감수 충주유림회장 양재 권혁노, 글 사진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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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공 부조묘 해설과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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