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 62-2] 牧使公 諱 博과 諸子孫 (종보 제431호 20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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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144회 작성일 12-04-20 21:25본문
참의공(參議公)의 2자 목사공 박(博)은 성종6년에 출생하여 음보로 중종 3년 도화서 별제(圖畵署 別提)가 되었는데 중종17년 사헌부감찰을 거쳐 태인현감, 중종 28년 통천군수, 중종 33년 선공감부정, 광흥창수, 중종 35년 장단부사(長湍府使), 중종 38년 공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원류(願留)를 받았고 명종 1년 상주목사 상주진관병마첨절제사(尙州牧使 尙州鎭管兵馬僉節制使)에 부임하여 이듬해 73세로 졸하니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양주시 덕계동에 있고 노수신(蘇齋 盧守愼)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짓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글을 썼다. |
△ 목사공 휘 박 신도비(경기도 양주시 덕계동) |
△ 목사공 신도비문(한석봉 글-양주시 덕계동) |
△ 목사공 휘 박 묘소(양주시 덕계동) |
아들은 백부에 출계한 덕유(德裕), 덕수(德秀), 월담공 덕여(德輿), 덕림(德林), 덕연(德淵)을 두었다. |
△ 21세 덕수의 묘소(양주시 덕계동) |
덕수(德秀)는 명종1년 식년시 생원으로 합격하여 참봉에 이르고 묘소는 덕계동 선고(先考) 계하에 있다. |
△ 목사공 숭덕재(양주시 덕계동- 재사를 묘소 아래로 이전 신축예정) |
월담공(月潭公) 덕여(德輿)는 중종 13년에 출생하여 중종3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명종17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 사간, 집의, 교리를 거쳐 정낭을 지내고 지제교와 춘추관의 직책을 겸대하면서 선조3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배되고 선조6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병조참의와 호조참의, 이조참의(吏曹參議), 도승지, 홍문관 제학, 성주목사, 광주목사, 선조 20년 춘천부사를 지내고 돌아와 졸하니 74세였다. 묘소는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수대곡에 있으며 월사 이정귀(李廷龜)가 신도비문을 짓고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전(篆)하였다. |
△ 21세 월담공 신도비(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수대곡) |
아들은 극순(克純), 풍담공 극중(克中), 극신(克愼), 극공(克恭)이며 풍담공(楓潭公)은 명종 15년에 출생하여 우계(牛溪)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선조 21년 식년시 진사로 합격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로 나갔는데 문경호가 정인홍의 사주를 받아 우계를 모함하니 귀향하고 광해 6년에 졸하니 55세였다. 의정부 좌참찬으로 추증되고 묘소는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선고묘 계하에 있다. |
△ 월담공 덕여의 묘소(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
풍담공(楓潭公) 극중(克中)은 초려공 진기(盡己), 송재공 책기(責己), 명고공 직기(直己), 월포공 경기(儆己), 백저공 위기(爲己), 첨지공 후기(後己), 참봉공 유기(有己), 참봉공 효기(孝己) 8남 3녀를 두었다. |
△ 22세 풍담공 극중 묘소(서종면 문호리 선고 계하) |
초려공 진기(盡己)는 선조 10년 출생하여 선조39년 식년시 문과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 도승지(都承旨), 형조참판을 지내고 춘천부사, 황해도,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문호리 조고묘 우록에 있다. |
△ 23세 진기의 묘소(문호리 조고묘 우록) |
진기의 아들은 충렬공(忠烈公) 순장(順長)이다. 공은 선조 40년 출생하여 인조 2년 18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건원능참봉, 빙고별제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안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조정에서는 국방을 소홀히 하여 38년 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공은 모친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고 조정에서는 한성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하여 강화를 수비토록 하였는데 그는 천혜의 요충지로 믿고 술을 마시며 대비를 꾀하지 안했다. 공은 분개하여 김익겸 등과 함께 글을 보내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임할 시기에 술마실 때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김경징은 오히려 화를 내니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공은 강개하여 “나와 더불어 강나루로 나갈자 없는가” 하니 선비들이 수성을 다짐하며 모여 들었다. 의여(義旅)라 이름하고 본진에 합류하였다. 이윽고 적병은 해협을 뒤덮으며 건너오니 관군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무너지고 김경징은 나룻배로 도망하였다. 적군은 도륙전을 펼치는데 성의 남문을 지키고 있던 공은 동지들과 필순(必殉)을 맹세하였다. “종묘사직이 위급한데 어찌 살기를 도모하랴” 김상용이 화약궤에 앉아 “그대들은 물러가라” 말하였다. 공은 눈물을 뿌리며 화살을 문루에 쏘기를 세 차례 하자 그때 대폭발이 일어났다. 공도 함께 돌아가니 31세였다. 공은 순절후 인조조에 지평(持平)으로 추증되고 숙종조에 이조판서 좌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인조 20년 강화 선행리에 현충사를 세우고 공과 김상용 등 26위를 배향하였으며 효종9년에 충렬사로 개명하였다. 또 영조조에 정려(旌閭)가 내리고 정조조에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명하였다. |
△ 24세 충렬공 순장의 묘소(문호리 재실 우측) |
공은 여주군 방목동에 장사하였다가 훗날 양평 수대곡 선영에 이장하였다. 배위 완산 이씨는 일이 주상에게 계문되자 정려(旌閭)를 하명하였고 공의 묘지명은 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찬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하였다. 종보 358호(2005.4.1)에 소개된 바 있다. 차자 순열(順悅)은 광해 3년에 출생하여 인조 11년 증광시 생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에 강화로 피란하여 성을 지키다가 27세에 형 순장과 함께 순절하니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렸다. 묘소는 서종면 문호리 증조 월담공 계하에 있다. 3자 순후(順厚)도 형과 함께 순절하니 정려(旌閭)가 내렸다. |
△ 충열공 순장의 신도비 |
월포공 경기(儆己)는 선조 17년 식년시 진사로 합격하고 보은, 평창, 청풍, 풍덕, 안성의 다섯고을의 군수를 지내고 78세에 졸하니 호초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에 있으며 최석정이 묘지를 짓고 부제학 조지겸이 비문을 지었다. 월포공 경기(儆己)의 장자는 순정(順正)이고 이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그 배 전의이씨는 인조15년 강화에서 순절하니 정려(旌閭)가 내렸다. 묘지는 선고 계하에 있다. 차자 순창(順昌)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인조 5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병자호란에 싸워 영국원종공신1등에 녹훈되고 현종2년 천안군수로 치적이 좋아 암행어사를 받았다. 묘소는 공주 금강 북쪽 진곡에 있으며 박세채가 묘지(墓誌)를 짓고 윤증이 비문을 지었다. 백저공 위기(爲己)는 선조 19년 출생하여 인조2년 식년시 별좌로 생원, 진사 양장에 합격하여 포천현감을 지냈다. 묘소는 공주시 이인면 주봉리에 있다. |
△ 25세 정간공 시경의 묘소(여주군 북내면 운천리 동막골) |
충렬공(忠烈公) 순장(順長)의 아들인 정간공(靖簡公) 시경(是經)은 인조 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심양으로 끌려가 환국하니 광릉참봉으로 녹보하였는데 학문에 힘써 효종8년 식년시 생원, 진사 양장에 합격하여 사복시 주부를 거쳐 숙종1년 함흥판관으로 증광문과 병과급제하였다. 사헌부 장령을 거쳐 호조, 형조, 병조, 예조 참의와 도승지가 되고 대사간, 병조, 이조참판을 거쳐 안동부사, 경상, 함경, 강원, 충청, 전라 5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며 한성판윤(漢城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 우참찬(右參贊),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후 숭정대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숙종9년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태사공 묘소 석물을 개수하고, 능동재사(陵洞齋舍) 추원루(追遠樓)를 건립하였다. 숙종34년 84세로 졸하니 정간(靖簡)의 시호가 내렸다. 묘소는 여주군 북내면 운천리 동막골에 있다. (다음호 계속) <감수 : 목사공종회장 권준식, 현봉 권경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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