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순례 57] 平厚公 諱 衷과 諸子孫 1 (종보 제424호 2010.10.1) > 추밀공파 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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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57] 平厚公 諱 衷과 諸子孫 1 (종보 제424호 2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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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784회 작성일 12-04-2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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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57] 平厚公 諱 衷과 諸子孫 1
정간공(靖簡公)의 3자(三子) 평후공 휘 충(衷)은 고려 충정왕 1년(1349년) 송도에서 출생하여 부친의 별서인 적성의 구연(龜淵)에서 성장하였다.
공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용략(勇略)이 있어 무예를 연마하면서 같은 이웃에 살던 이태조(李成桂)를 따르며 자라다 성년이 되어 그의 휘하에 들어가 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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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후공 휘 충 묘역(여주군 강천면 가야리 오감동)

첫 관직은 공민왕 21년(1372년) 24세 때 군기시녹사(軍器寺綠事)였고 이어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 군기시윤(軍器寺尹) 전의령(典儀令)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의 3품관이 되었고, 44세인 공양왕 4년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는데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개국하자 공을 징소(徵召)하였다.
번민하던 공은 별서에 들른 아우 양촌(陽村)을 시켜 스승 목은(牧隱)에게 처변지도(處變之道)를 묻게 하였다. 목은은 대답하기를 “길이 사람의 일을 생각해서는 매이지 않고 자유(自遊)함이 가하겠고,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정세로 보아서는 남이 말하기 어렵다(永感人事 猶可自遊 侍下情勢 人所難言)”라 하였다. 사람의 일로 보아서는 절의를 지켜야겠으나 별업에서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형편과 정세로 보아서는 남이 어떻게 말하기 곤란하다는 말이다. 공은 태조와 사은(私恩)을 생각해서 징소를 거역할 수 없으니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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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후공 묘역 정화기념비

세종실록에 ‘우리 태조가 원종공신의 녹권을 하사하고 호조전서를 배하였다(我太祖賜原從功臣之券拜戶曹典書)’라 되어있다. 전서는 고려조 정3품 판서와 동일하였고 조선 태종조에 정2품 판서제도로 바꾸어 조정에 6조를 두었다.
정종 2년(1400년) 52세에 세자가 된 방원의 추천으로 의주등처도병마사 겸 판의주목사(義州等處都兵馬使 兼 判義州牧使)로 나아가 이듬해 명나라 육옹(陸顒)이 칙사로 올 때 예로 잘 예우하였다.
공은 태종 2년 경기좌우도 절제사(節制使)가 되고 내직으로 병조(兵曹)와 이조(吏曹) 전서(典書)를 지내고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고 세종실록 5년 11월 19일 기록되었다. 태종 8년(1408년) 60세에 이성등처도병마사 판삭주부사(泥城等處都兵馬使 判朔州府事)가 되었는데 임금이 낙점하여 가족을 데리고 부임토록 허가하였는데 이는 당시 각 지방의 진수(鎭守)와 변방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한 시책으로 훈신을 특채해 보낸 것이다. 태종 11년(1411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와 좌명원종공신(佐命原從功臣)의 녹권과 포상으로 전토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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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공참공 휘 호 단소(원주시 우산동 엄현)

태종 12년 12월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로 나갔는데 이듬해 봄 남강제방을 수축하니 홍수의 범람을 막고 가을에 촉석루를 중건해 낙성하니 하륜(河崙)이 기문을 지었다. 촉석루는 왜구가 해안에서 침입하여 내륙으로 와 극성을 부릴 때 소실되어 부로(父老)와 백성들이 중창하는 숙원으로 스스로 재물을 거두어 용두사 주지가 주관하던 차, 공이 부임하여 인력을 소집하고 중창을 서두르니 9월 준공을 보게 되었다. 태종은 이해 가을 임실에 금수가 많다는 말에 사냥을 겸한 순행을 나갔는데 공이 행재소(行在所)에 달려와 알현하였다. 태종이 ‘경이 멀리서 나를 보러 왔으니 나를 좇아 유람하지 않겠는가?’ 하니 공은 기력이 혼모(昏耗)하다 하므로 태종은 내직인 도총제(都摠制)를 배하였다. 도총제는 삼군도총제부의 으뜸 벼슬이다. 태종 14년(1414년) 명나라 조정에 기린이 출현하는 서조(瑞兆)가 났다 하자 공이 66세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와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제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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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사직공 강 묘소(여주군 강천면 간매리)

세종 2년(1420년) 72세에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고 세종 5년(1423년) 11월 75세로 적성의 별업에서 졸하니 조정에서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시호를 평후(平厚)로 내렸다. 평(平)은 사려가 깊음이고 후(厚)는 잘못이 없음이다. 다음 달 세종(世宗)이 제문(祭文)으로 사제(賜祭)하니 그 대의는 「경(卿)은 벌열(閥閱)의 사후로서 용략(勇略)의 자질이 있어 무예를 정련(精練)하고 이치(吏治)의 재주에 통달하여 약관에 선봉으로 태조가 잠룡(潛龍)에 계실 때 지우(知遇)를 입어 출정한 공로가 많았고 태종(太宗)을 섬김에 있어서는 그 잠저시(潛邸時)부터 함께 가상(嘉尙)하여 원종(原從)의 훈공에 녹권하며 우리 왕가에 충근(忠勤)함이 적지 않도다.

변방에서 군사를 총괄함에는 장수의 본분을 다하고 선대의 조정에 힘을 펼쳐 여러 선왕(先王)이 직질을 올렸으므로 내가 즉위하여 찬성(贊成)을 제수하고 영년(永年)토록 우유(優遊)하기 바랐는데 어찌 하늘이 노성인(老成人)을 남겨두지 않는단 말인가. 실로 슬프고 상심하여 전(奠)을 펼치니 영령(英靈)을 위로하노라」
공은 정사(政事)를 펼때는 정도(正道)를 으뜸으로 삼았고 평소 희노(喜怒)를 나타내지 않고 담박(淡泊)한 성품에 베풀기를 좋아하니 사람들이 춘풍재상(春風宰相)이라 하였다. 묘소는 장단 점원리에 합폄하였는데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 오감동에 이장하였다.
공은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상호군(上護軍) 존례(存禮)이고 차남은 예참공(禮參公) 숭례(崇禮)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으며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여주군 가야리 선고묘 좌록에 이장하였다가 1990년강릉 경포대 서회포로다시 천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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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휘 비 묘소(원주시 본부면 우곡)

3남 함(諴)은 사직(司直)이고 4남 공참공(工參公) 호(護)는 세종 9년(1427년) 지기장현사(知機張縣事)로 부임 시 왕은 “금년에 한해가 심하여 지남. 경상도는 수확이 적다 하니 가서 진력하고 한 백성이라도 굶주리지 않게 하라” 하였다. 세종 17년 삼척도호부사가 되고 세종 23년 황주목사를 역임하고 세조 1년 경대부(卿大夫) 판사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묘소는 실전하여 원주시 우산동에 설단하였다. 5남은 부사 눌(訥)이며 후사가 없다.
상호군(上護軍) 존례(存禮)는 장(章) 의(宜) 호군(護軍)정(靜) 3남7녀를 두었는데 정(靜)은 균(均)을 두고 19세 균(均)은 수형(守衡)과 수칭(守稱)을 두었다.

예참공(禮參公) 숭례(崇禮)와 후손(後孫)(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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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후공 5대손 비 전력부위공 종중 빌딩(원주시)

공참공(工參公) 호(護)와 후손(後孫)
공참공(工參公) 호(護)도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미(彌) 차자는 강(强) 사직공이며 묘소는 강천면 간매리 고장박이다. 3자 인(引)은 세조 4년 한성판관 좌익원종공신, 세조 12년 연안부사, 14년 도총부진무(鎭撫), 성종 11년 황주목사가 되었다. 공참공(工參公)의 묘소는 실전하였는데 원주시 우산동 엄현에 설단하였다.
강(强)의 아들은 통찬공 순(淳)으로 통례원 좌통찬(左通贊)에 보임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강천에 은거하였다. 순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광, 현(晛) 한(暵)이며 3남 한(暵)은 직장을 지내고 광량진수군첨절제사가 되고 통정대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묘소는 원주시 저전동이다. 한(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수(穟)로 사직을 지냈고 묘소는 선고묘 계하에 있다. 차자 거(秬)는 통사랑(通仕郞)으로 임번에서 고궁(固窮)케 지내니 사람들이 처사(處士)라 했다. 묘소는 원주시 소초면 계암촌이다. 통사랑(通仕郞)은 영(瑛)을 두고 영은 응시(應時)와 응형(應衡)을 두니 이후 자손이 번성하였다.
삼자 비(秠)는 전력부위(展力副尉)이며 아들은 어모장군 충좌위(禦侮將軍 忠佐衛) 침(琛) 이며 침은 응서(應瑞) 응복(應福) 응정(應禎)을 두니 모두 자손이 번성하였다. 묘소는 원주시 본부면 우곡이며 원주시에 전력부위공종중 회관을 유지하고 있다.
(감수: 평후공회장 권순선, 강릉낙향조16세손 권오열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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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휘 거 묘소(원주시 소초면 게암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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