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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48] 梅軒公 諱 遇와 三子 判尹公 措 湖堂公 採 參判公 技 (종보 제411호 200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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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186회 작성일 12-04-2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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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48] 梅軒公 諱 遇와 三子 判尹公 措 湖堂公 採 參判公 技

1. 매헌공(梅軒公) 휘(諱) 우(遇)

공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출생하였으며 선생의 휘는 우(遇)요 매헌(梅軒)은 자호(自號)이고 추밀공 (樞密公의 칠세손(七世孫) 이다.

증조부는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내신 국재공(菊齋公) 휘 부(溥)이고 조부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지내신 충정공(忠靖公) 휘 고(皐)이며 부친은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내신 정간공(靖簡公) 휘 희(僖)이다. 큰형은 도총관(都摠管)을 지내신 공경공(恭景公) 휘 화(和)이며 둘째 형은 공조판서(工曹判書), 찬성사(贊成事)를 지내신 평후공(平厚公) 휘 충(衷)이며 셋째 형은 양촌(陽村) 휘 근(近)이다.

공은 어려서는 형 양촌공에게 배우다가 장성해서는 정포은(鄭圃隱)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하였다. 공은 우왕 3년(1377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동 8년 임술에 생원(生員), 동 1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박사(博士)를 거쳐 공양왕 말기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공은 포은에 이어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당대의 문형(文衡)들을 배출하였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의하면 포은이 선죽교에서 교살 당하기 전에 이성계(李成桂)에게 문병간다고 나설 때 공이 수행코자 하였는데 죽음을 예견한 포은은 “내가 지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가는데 네가 어찌 그것을 모르느냐? 너도 화를 당하면 장차 누가 남아서 나의 뒤를 이을 것이냐?”하여 마침내 공을 떼어 놓아 학통을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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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사당(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산60번지)

조선왕조가 건국한 후에 양촌과 함께 출사한 공은 교서감승(校書監丞) 등을 거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올랐으며 태종 11년(1411년) 신묘에 사마시(司馬試)를 관장하면서 전시(殿試)의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동 18년(1418년) 무술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자 빈객(賓客)이 되어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공의 문장과 도덕은 문충공(文忠公:근)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며, 충령대군이 임금이 되었을 때도 같이 하였다.

공의 행적이 권람이 찬한 행장에 상세히 나와 있으니

부친인 휘 희(僖) 또한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지고 지위는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간공(靖簡公)으로 수가 87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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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사당(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산60번지)

고려 우왕 3년(1377년) 봄에 15세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되 장원(壯元) 하고 우왕 8년(1382년) 여름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제 2인으로 급제하였으며 우왕 11년(1385년) 봄에 포은(圃隱)선생 정시중몽주(鄭侍中夢周)가 지공거(知貢擧)로 있을때 을과(乙科)의 제 2인으로 발탁하여 여름에 문첩녹사(文牒綠事)를 보하였으며, 우왕 12년(1386년)에는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를 보하였다.

조선 태조 1년(1392년) 여름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으며 갑술년(1394년) 가을에는 외직(外職)으로 나가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었다. 1405년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올라 지제교를 겸하고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었다. 태종 8년(1408년)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었으니 이는 당시의 고선(高選)이었다. 이어서 지제교(知製敎)와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으며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 집현전과 지제교를 겸했다. 1411년 사마시를 주장(主掌)하여 권극화(權克和) 등 1백인을 발탁하였다. 1414년 봄에 전시(殿試)에서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 33인을 급제시켰으며 과시(科試)를 장악하여 많은 유명인과 현달한 관원을 발탁하였다.




훗날 지재 문경공이 문학으로서 경연 자리에 입시하자 세종이 일러 가로되, “네 숙부의 학문은 실로 정수(精粹)하고도 절실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더욱 그 정수함을 알겠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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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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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신도비문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청수(淸粹)하고 학문이 정통(精通)하였으며 문벌가에서 생장하였으되 빈한하고 소박하게 스스로 처세하였으며 하루가 다하도록 단좌해 앉아 실린 문적(文籍)에 침잠하였다. 어떤 학자가 양촌선생에게 중용(中庸).대학(大學)과 주역(周易)에 대한 수업을 청하니 양촌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아우만 같지 못하니 마땅히 가서 배우도록 하라.”하였다. 이로 인하여 배우려는 무리가 길을 메우고 매일 새벽이면 그 문 앞에 다투어 모여서는 미처 섬돌과 뜨락으로 들어오지 못한 자는 밖에서 벽과 담장에다 귀를 갖다

대고 들었으며 선생 또한 반드시 듣는 자로 하여금 충분히 이해케 한 연후에야 그만두었으므로 학자들이 열복(悅服)하였다.

공은 세종 원년(1419년) 녹름직(祿凜職) 부윤(府尹)으로서 졸하니 춘추가 57세였다. 세종이 부고를 듣고는 통석(痛惜)하였으며 태종 또한 사신을 보내 치전(致奠)하였다.

묘소는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후록 봉현 산60번지에 부인과 합장되어 있는데 실전되었다가 고종 13년 13대손 택유(澤儒)가 지석(誌石)을 찾아 단장하고 위토를 마련하였다. 2000년 경진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며 2001년에 재사를 건립했다.

생전에 양촌의 행장(行狀)을 찬하였고, 양촌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의 글씨를 썼으며, <매헌집(梅軒集)> 6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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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신도비명



공은 4남4녀를 두었으며 장남 조(措)는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과 평산부사를 지냈으며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묘소는 선고묘계하(先考墓系下)에 子坐이고 음 3월 10일 춘향제를 올린다.

둘째는 호당공(湖當公) 채(採)이며, 삼남 기(技)이고 넷째는 현령 안(按)이다.


호당공(湖當公) 휘(諱) 채(採)

공은 매헌공의 제 2子로 자는 여서(汝鋤)이고 호는 일재(一齋)이며 정종 1년(1399년) 출생하여 태종 17년(1417년) 2월 12일 맹사성(孟思誠)과 변계량(卞季良)이 실시한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壯元)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니 19세였다. 세종 2년(1420년) 22세로 집현전(集賢殿)의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29세로 조선조에서는 최초로 실시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또 을과(乙科)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應敎)로 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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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판윤공 조의 묘소


이보다 앞선 세종 8년(1426년) 임금은 집현전에 있는 문신들에게 하교하기를 “그대들은 나이 젊고 장래가 있으니 이제부터 잠시 직임을 제(除)하고 각자 집에서 안돈하고 독서에 전심하여 그 실효를 두드러지게 이루도록 하라.” 하고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게 하였다. 이것이 호당(湖堂)이니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시작이었다. 변계량의 선발로 사가독서에 든 사람은 공과 더불어 남수문(南秀文), 신석조(辛碩祖)인데 세종이 처음 실시한 이 사.가독서는 관원에게 급료를 주면서 자가에서 연수를 시킨 조선조 최초의 제도이며 공이 호당에 제일 첫 번째로 들어간 것이며 안동권씨 4시(四始)중 하나이니 그 四始는 다음과 같다.

양촌(陽村) 휘 근(近)이 조선조 최초로 전문형(典文衡:대제학)에 등재되었고

양촌의 둘째아들 지재(止齋) 휘 제(踶)와 손자 소한당(所閒堂) 휘 남(擥)과 내종 서거정(徐居正)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

정2품 이상 70세 이상이 입사할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정간공(靖簡公)

휘 희(僖)가 최초로 들어간 것이며

호당공 휘 채(採)가 최초로 사가독서 호당(湖堂)에 들어간 것이다.

이상 네 가지 효시의 자랑거리가 모두 정간공 희와 그 아들 근, 손자 제와 채 그리고 증손 람의 한 집안 4대에서 이루어졌다.

공은 세종 17년(1435년) 당상관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겼으며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공은 젊은 나이에 당대에 따를 자가 없는 문장가가 되었는데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공은 세종 14년(1432년) 고조부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의 <효행록(孝行錄)>에 서문을 지었고 세종 20년(1438년) 양촌의 <황명응제시권(皇明應制詩卷)>에 발문(跋文)을 지었으며 정몽주(鄭夢周)의 <포은시권(圃隱詩卷)>에 서문을 썼다. 또 공은 의학자(醫學者)인 유효통(兪孝通), 노중례(盧重禮), 박윤덕(朴允德)과 더불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 발간하였다. 공이 공찬한 <향약집성방>은 이른바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전신으로 고래의 우리나라 약방문(藥方文)을 집대성한 의서의 고전이다.

공의 역저는 <작성도(作聖圖)>이다. 이 <작성도>는 양촌의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주자(朱子)의 장구(章句)를 근거로 지은 도설(圖說)이다. 공이 지은<천인심성설(天人心性說)>은 이현간(李玄澗)이 “미묘(微妙)함을 발휘하여 후학에게 혜택을 주었는데 그 연원은 다 양촌에게서 나온 것이다.”라 하였다.

이같이 현달한 공이 세종 20년(1438년) 무오에 돌연히 병졸(病卒)하니 수가 40세에 불과하였다. 부문(訃聞)을 듣자 세종이 진도(震悼)하여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에 “발탁하여 후설(喉舌:임금에게 혀와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승지를 이름)의 직임을 맡기고 장차 크게 쓰고자 하였거늘 불행한 것이 안회(顔回:공자의 수제자)와 같이 되었도다.” 하였다. 묘소는 실전되었는데 공이 졸한지 480년이 지난 1917년 전북 정읍군 칠전면 분토동(漆田面 粉土洞)에 단소를 설하였으며 음 3월 16일 양호제(洋乎齊)에서 향사를지낸다.

2008년 10월25일 대전시 침산동 뿌리공원에 준공된 권문의 상징 조형물에는 사시(四始)가 음각되어 있으니 정간공과 그 자손들의 현달한 덕업이 권문을 영원토록 빛내고 있다.



참판공(參判公) 휘(諱) 기(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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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재사 장현리

3남 기(技)는 자는 유지(有之)이고 태종(太宗)5년 1405년 출생하였다. 사마시(司馬試)로 진사(進士)가 되고 세종(世宗)14년 1432년 28세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등을 지내고 세종20년(1408년) 사간원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다. 세종25년(1443)사헌부지평이 되어 실록(實錄)에 3차에 걸쳐 행적이 올랐다. 문종2년(1452)년 금산군사(錦山郡事)가 되었으며 부친의 제자인 전라감사 김연지(金連枝)의 도움을 받아 부친의 유고 매헌집(梅軒集)을 인간하였고, 단종(端宗)1년 금산군사로 재직하였다. 50세가 되는 단종2년 1454년 4월 찬술을 시작한 춘추관(春秋館)의 문종실록(文宗實錄) 편수관에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의흥시위사상호군(義興侍衛司上護軍)으로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대하였다. 세조2년 사간원우사간(司諫源右司諫)로 보임되고 동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세조3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2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세조10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에가 대행황제(大行皇帝)에게 하례하였다.

세조13년 1467년에 졸하니 수는 64세이며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교촌 수진동에 임좌로 쌍분이며 좌찬성(左贊成) 서거정(徐居正)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감수 : 종회장 권혁진(權赫鎭) 011-390-3449 권공범 011-9843-7900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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