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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묘와 운곡서원

[유적지 순례 50] 태사묘 연혁 1 (종보 제413호 20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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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20 19:28 조회4,2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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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순례 50] 태사묘 연혁 1
태사묘는 성종2년(983년)안동부사(安東府司)에서 3공신에게 제향을 올리면서 비롯되었다. 문헌비고(문헌비고)에는 “안동부에 삼공신묘가가 있는데 고려초에 세웠으며 태사 권행, 태사 김선평, 태사 장정필이 봉안되었다”고 하였으며 모재 김안국(金安國)은 “권태사의 장손 휘 책(冊)이 스스로 구하여 안동부의 호장이 되고 대대로 3공신의 사당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신라와 고려의 즈음에 사묘(祠廟)의 제도가 미비하니 3공신의 위판은 부사(府司)에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3공신의 사당이 부사(府司)에 있고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의 사당이다”라고 하였다.


능동실기 모제소장원기(慕齋所藏原記)에는“고려(高麗)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고 향리(鄕吏)의 직명(職名)은 당대(堂大)로써 호장(戶長)이라 하고, 등대(等大)로써 부호장(副戶長)이라 하고, 낭중(郎中)으로써 호장동정(戶長同正)이라 하고, 원외랑(員外郞)으로써 부정(副正)이라 하니 공(公)의 장손(長孫)인 책(冊)이 자원하여 본부호장(本府戶長)이 되어 대대로 삼공신사당(三功臣祠堂) 일을 주관(主管)하였다. 삼국사(三國史)에 의하면 삼공신제사(三功臣祭祀)를 부사(府司)에서 받드니 매년 호장이 주간(主幹)하였다. 사묘(祠廟)의 제도(制度)가 미비(未備)하여 삼공신(三功臣)의 위패(位牌)는 부사(府司)에 있었다. 府司」라는 것은 곧 호장의 처소(處所)니, 부중(府中)의 고물(古物)을 다 맡겨 보관케 하였다.

고려초(高麗初)에 부(府)땅으로 전토(田土)를 주어 대대로 그 소입(所入)을 먹게 하였으므로 고창군(古昌郡) 지세(地稅)를 나누어 삼공신(三功臣)의 제사를 차렸으나 세대(世代)가 멀어짐에 따라 세입(稅入)이 장차 없어지니 군백성(郡百姓)들이 재생(再生)한 은혜를 생각하여 곡물(穀物)을 수합(收合)하여 부사(府司)에 맡겨 두고 제향(祭享)을 보조(補助)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太師廟事實記年에 태사묘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수록되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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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묘 사당

고려(高麗) 성종(成宗) 계미년(癸未年)에 비로소 삼공신(三功臣)의 제사를 안동부사(安東府司)에서 거행하였다.조선조(朝鮮朝) 성종(成宗)12년(1481년)에 경상감사(慶尙監司) 김자행(金自行)이 목면(木綿)을 주어서 자산(資産)을 세웠다.

중종(中宗)37년(1542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김광철(金光轍-權太師公 外孫으로 江陵金氏) 부사(府司) 옛터를 정리하여 새롭게 하고 비로소 묘우(廟宇)를 세웠다. 경상감사(慶尙監司) 권철(權轍)이 제전(祭田)을 두고 묘(廟)의 노복(奴僕)을 주었다.

명종(明宗)10년(1555년)에 비로소 사명절(四名節) 제사를 정하니 「정조(正朝) 단오(端午) 추석(秋夕) 동지(冬至)」다.

명종(明宗) 병진년(丙辰年-서기 1556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권소(權紹)가 제전(祭田)과 노복(奴僕)을 더 두었다.

명종(明宗) 계해년(癸亥年-시기 1563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권응정(權應挺)이 묘(廟)뜰에 비(碑)를 세우고, 또 제전(祭田)과 위전(位錢)과 노복(奴僕)을 더 설치하고 본부(本府)에 사는 권씨(權氏) 한 사람과 호장(戶長)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管掌)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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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보당

선조(宣祖)18년(585년)에 권호문(權好文)이 본묘(本廟)의 도유사(都有司)가 되어 의논하여 제례규칙(祭禮規則)을 정하였는데 사시절사(四時節祀)의 예(禮)가 너무 번거롭고 어지러우므로 다만 춘추(春秋)에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행사하기로 정하였다.
선조(宣祖)21년(1588년)에 경상감사(慶尙監司) 권극지(權克智)가 제전(祭田)과 위전(位錢)을 두었다. 선조(宣祖)25년(1592년)에 왜란(倭亂)이 급하게 되니 부사(府司)의 고(庫)지기 김갑이(金甲伊)가 삼태사(三太師) 위판(位版)을 모시고 임남면(臨南面) 국란리(菊蘭里)의 심벽(深僻)한 곳에 들어가서 바위굴 사이에 봉안(奉安)하고 난리가 평정(平定)되어 모셔다가 관가(官家)에 바치니 관(官)은 조정(朝廷)에 상달(上達)하여 곧 천민(賤民)의 신분(身分)을 면하였다.

선조(宣祖) 기해년(己亥年-서기 1599년)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위전(位錢)을 보내고 제전의식(祭典儀式)을 제정(制定)하였다. 광해군(光海君) 계축년(癸丑年-서기 1663년) 7월에 경상감사(慶尙監司) 권반(權盼)과 경주부윤(慶州府尹) 권태일(權泰一)이 구묘(舊廟)가 낮고 작으므로 안동권문(安東權門)과 협의하여 돈을 모아 새로 건축하고, 묘호(廟號)를 비로소 태사묘(太師廟)로 개정(改定)하고 10월 준공하니 사당 3간, 신문 3간, 신주 3간, 재실 18간이 동서재로 나누고 행낭 5간, 문 밖에 하마비를 세웠으며 봉안하였는데 권태사를 제일 먼저 중앙으로 하고 동쪽에 김태사, 서쪽에 장태사 순으로 옛 위치 그대로 하였다.

광해군(光海君)13년1621년)에 작헌(爵獻)의 선후(先後)에 대한 변론(辯論)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인조(仁祖)25년(1647년)에 본묘유사(本廟有司)가 의논하여 각종 곡물 3백3십석(石)과 포목(布木) 5동(同-5백疋)을 정액(定額)으로 정하고 관장(管掌)케 하였다.

효종8년(1657년)에 곡식 330석을 정액으로 하였는데 병자호란의 피해를 확충한 것이다.
숙종(肅宗) 4년(1678년)에 안동김씨문중(安東金氏門中)이 본부(本府)에 문서를 올려 잔을 드리는 차례를 변경하고 묘(廟)의 임무를 일향(一鄕)이 공통으로 처리하고자 하므로 경향(京鄕)의 여러 권씨(權氏)로부터 통문(通文)이 일제히 발표되어 그 의논은 시행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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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사묘비와 태사공 묘정비

숙종(肅宗) 5년(1679년)에 재실(齋室)을 중건(重建)하였다.
숙종(肅宗) 8년(1682년)에 권김(權金) 양문중(兩門中)이 상소(上疏)하여 쟁변(爭辯)하다가 추향(秋享)을 동(東)쪽이 상위(上位)라는 예(禮)로 거행하고 향탁(香卓)을 각각 설치하였다.
숙종(肅宗)15년(1689년) 9월에 권유(權愈) 등이 상소(上疏)하여 중위(中位)가 높다는 예(禮)로 회복하였다.
숙종(肅宗)34년(1708년) 8월에 묘우(廟宇)를 중수(重修)하였다.

숙종(肅宗)44년(1718년) 8월 11일에 안동부사(安東府使) 권이진(權以鎭)이 부사로 부임하여 태사묘의 분규를 수습하고 원만히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권태사에게만 축을 읽던 것을 각축으로 하여 향탁(香卓)을 각각 설치토록 하였다.

경종(景宗)원년(1721년) 3월 16일에 안동부(安東府) 성(城)의 서문(西門)이 실화(失火)하여 5백여 호(戶)가 연소하니 관청(官廳)이 다 없어지고 부사(府司)도 또한 면하지 못하였으나 유독(惟獨) 묘우(廟宇)만이 보전되어 위판(位版)을 무학당(武學堂)으로 옮겨 모시고 부사를 개수(改修)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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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각

영조(英祖)2년(1726년)에 김창열(金昌說)이 상소(上疏)하여 헌작(獻爵)하는 예(禮)를 쟁변(爭辯)하매 영조(英祖)5년(1729년)에 삼위(三位)에 각각 향탁(香卓)을 설치하였다.

영조(英祖)32년(1756년)에 김운경(金雲慶)이 묘장(廟長)이 되어 배헌(拜獻)하는 예(禮)를 자의(自意)로 행하므로 권씨문중(權氏門中)이 항쟁(抗爭)하였고, 또 권씨로써 임원(任員)을 내었다.

영조(英祖)40년(1764년)에 김응순(金應淳)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는데 정해년(1767년)에 김시교(金時敎)가 상소(上疏)하여 김태사(金太師)에게 먼저 헌작(獻爵)하기를 청하니 왕이 전교(傳敎)하여 이르기를 “3태사의 사당은 천년이 되었는데 어찌 이다지 특별한가, 사당을 창건한 것은 고을 백성들의 의리에서 였거늘 이를 조정에 계문(啓聞)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 전작(奠爵)하는 선후(先後)에 있어 어찌 그 사이를 다툴 것인가? 김태사에게 먼저 제사한 것이 임술(1682년)인데 기사(1689년)에는 권태사에게 먼저 제사하였다. 권씨가 주인(主人)인 고로 좌우로 운위하는 것 같다. 권이진(權以鎭)의 말이 옳다. 3태사의 사당에는 권씨가 집권해 온 것 같고 권씨가 주장해온 것이 오래인 것 같은데 여지승람을 읽으라 숙종의 전교를 보면 권이진이 일시에전작케 한 예법이 행할만 한 것이니 그렇게 하면 선후가 없어질 것이다. 태사묘(太師廟)에서는 병헌각축(幷獻各祝), 향탁각설(香卓各設)을 행하고 임사(任事)는 향인(鄕人)에게 전부(傳付)케 하라 이 글을 보내어 시비(是非)의 발단(發端)을 엄중히 막으라」하니 헌작(獻酌)은 같이 하고 축문(祝文)은 각각 읽으니 삼헌(三獻)하던 것이 구헌(九獻)이 되고 독축(獨祝)은 삼축(三祝)이 되었다. 영조 51년 향탁 각설을 바로 잡아 중앙 권태사 앞에만 두었다.

고종(高宗)28년(1891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김가진(金嘉鎭)이 다시 삼위(三位)의 향탁(香卓)을 설치하였다.

광무(光武)5년(1901년)에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김석근(金晳根) 등이 상소(上疏)하여 위차(位次)를 변경코자 하므로 의정부(議政府) 찬정(贊政) 권중현(權重顯) 등이 대소(對疏)로 쟁변(爭辯)하여 일이 드디어 종식(終熄)되었다.
12월호에 계속
<賢奉 權景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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