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공 김알지와 미추왕, 태사공 사성유래 (종보 제435호 20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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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935회 작성일 12-04-20 19:25본문
대보공 김알지와 미추왕, 태사공 사성유래 |
王의 명을 받은 匏公(호공)은 始林(시림)으로 가서 살펴본즉 뜻밖에도 거기에는 금빛 찬란한 金櫃(금궤)가 나무에 걸려있고 그 옆에는 큰 흰닭이 울고 있어 포공은 크게 괴이하게 생각하며 그 사실을 왕에게 告(고)하였다. 王 또한 크게 놀라 그 금궤를 가져다 열어본즉 그 금궤 안에는 얼굴이 俊秀(준수)하고 아주 잘 생긴 玉童子(옥동자)가 들어있었다. |
1. 대보공 김알지 王의 명을 받은 匏公(호공)은 始林(시림)으로 가서 살펴본즉 뜻밖에도 거기에는 금빛 찬란한 金櫃(금궤)가 나무에 걸려있고 그 옆에는 큰 흰닭이 울고 있어 포공은 크게 괴이하게 생각하며 그 사실을 왕에게 告(고)하였다. 王 또한 크게 놀라 그 금궤를 가져다 열어본즉 그 금궤 안에는 얼굴이 俊秀(준수)하고 아주 잘 생긴 玉童子(옥동자)가 들어있었다. 王은 매우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朕(짐)에게 點指(점지)해 주신 아들이라 하시고 精誠(정성)을 다해 養育(양육)하였더니 아이는 지극히 聰明(총명)하고 智略(지략)이 뛰어나 王은 이 아이를 後嗣(후사)로 정하고 이름을 閼智(알지)로 하고 금궤에서 誕生(탄생)하였다 하여 姓(성)을 金(김)이라 하였으니 이가 곧 大輔公 金閼智(대보공 김알지)로 오늘날 新羅金氏(신라김씨)의 始祖(시조)인 것이다. 그 후 始林(시림)을 닭이 울었다 하여 鷄林(계림)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
경북 경주시 교동 1번지(경주계림) 사적 제19호 |
2. 味鄒王(미추왕) 味鄒王(미추왕)은 大輔公(대보공)의 6世孫(세손)으로 金氏로서는 처음으로 王位에 오르신 분이시다. 新羅(신라)는 朴赫居世(박혁거세)왕의 後孫(후손)인 朴氏(박씨)임금이 10王, 昔脫解(석탈해)王(왕)의 後孫 昔氏(석씨) 임금이 8王, 金大輔公(김대보공)의 後孫 金氏(김씨)임금이 38王으로서 모두 56王이며 新羅는 朴, 昔, 金氏가 서로 전하여 임금이 되어 1千年의 新羅社稷(신라사직)을 지켰다. 高麗太祖(고려태조) 王建(왕건)은 論功行賞(논공행상)을 함에 있어서 우리 始祖 金幸(시조 김행)님에 대하여는 능히 機微(기미)에 밝아 權道(권도)에 통달(炳幾達權)했다 하여 權으로 賜姓(사성)하고 古昌郡(고창군)을 安東府(안동부)로 昇格(승격)시켜서 食邑(식읍)으로 내리고 三韓壁上 三重大匡 亞父功臣 太師(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 태사)를 除授(제수)하였다. 이로서 權姓(권성)의 賜姓由來(사성유래)가 되니 실로 그 綠故(록고)가 크다 하겠다. 결코 간단하게 賜姓(사성)됨이 아니니 거룩한 권씨라 하겠다. |
계림 : 교동 1번지 |
1)大輔公(대보공)과 味雛王(미추왕) 大輔公 金閼智(대보공 김알지)의 아들은 勢漢(세한)이고 孫(손자)는 阿道(아도) 4世 首留(수유) 5世 郁甫(욱보) 6世 仇道(구도) 7世 味鄒(미추)이다. 味鄒王(미추왕)은 昔脫解王(석탈해왕)의 11世孫(세손) 助賁王(조분왕)의 婿(사위)이며 大輔公 金閼智(대보공 김알지)의 6世孫으로 仇道(구도)의 아들이다. 助賁王(조분왕)이 昇下(승하)하니 동생인 沾解王(첨해왕)이 登極(등극)하였으나 그 역시 後嗣(후사) 없이 승하하여 처음으로 金氏 姓(김씨성)인 味雛王(미추왕)이 登極(등극)하였다 (서기 262년) |
경북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
2) 大輔公(대보공) 과 太師公(태사공)과의 관계 始祖 太師公(시조 태사공)의 出生(출생)과 先代(선대)에 대해서는 考證資料(고증자료)가 없다. 다만 大輔公(대보공)이 昔脫解王(석탈해왕) 9년 서기 65년에 출생하고 865년뒤인 930년에 賜姓權 (권씨로 사성)받았으니 1代를 30年으로 볼때 太師公(태사공)께서는 大輔公(대보공)의 28세손 혹은 29세손으로 예측할 수 있다. ※ 味雛王(미추왕)이 西紀 262年에 登極(등극)하고 그로부터 668年뒤인 930年에 賜姓權(사성권) 하였으니 太師公(태사공)은 味雛王(미추왕)의 22世孫으로 예측할 수 있다. |
미추왕릉, 전면중앙 혼유석 |
3) 太師公 墓所(태사공 묘소)와 享祀(향사) 太師公(태사공)의 墓所(묘소)는 慶北 安東市 西後面 城谷里(경북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天燈山 鳳停寺(천등산 봉정사) 앞에 있으니 造火谷(조화곡)의 子坐(자좌)이다. 묘가 있는 마을 이름은 金鷄(금계)니 陵洞(능동)이라고도 한다. (慕齊藏原記) 葬事(장사)하여 모신지 6, 7백년간 失傳(실전)하여 찾지 못하였으나 서기 1470년경에 平昌郡事(평창군사) 17世 權雍(권옹=樞密公7세손)이 安東府(안동부)사람 吏曹正郞(이조정랑) 裵素(배소)의 딸과 결혼하여 安東府 豊山縣 河回村(안동부 풍산현 하회촌)에 살면서 與地勝覽(여지승람)을 보다가 始祖 太師公(시조 태사공)의 墓所(묘소)가 天燈山麓(천등산록)에 있는 것은 알았으나 碑石(비석)도 없고 오랜 세월이 흘러 찾을 수가 없어 地士(지토)와 함께 山麓(산록)을 두루 살피다가 誌石(지석)을 발견하고 흙을 모아 封墳(봉분)을 쌓고 장차 碑石(비석)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우지 못하고 卒(졸)하시니 臨終時(임종시)에 階下(계하)에 附葬(부장)할 것을 遺言(유언)하였다. 嘉靖 丁巳年(가정정사년,西紀1557年) 安東府使(안동부사) 20世 權紹(권소=檢校公10世孫 湖堂 達手(달수)의 子)가 陵下(능아래)에 사는 後孫 權審行(권심행) 權夢斗(권몽두) 外孫(외손) 柳公季(유공계)를 시켜서 흙을 갈아내고 떼를 고쳐 改築(개축)할 때 옛 封墳(봉분)을 파헤치니 넓은 돌이 壙中(광중)에 덮혀 있고 子午針(자오침)을 띠워보니 子坐午向(자좌오향)이었다. 이로부터 해마다 寒食日(한식일)에 墓所(묘소)에 祭祀(제사)를 奉行(봉행)키로 하였다. 孝宗(효종)4년(서기1653년) 慶尙道觀察使(경상도관찰사) 24世 權堣(권우=樞密公14世孫)가 묘소아래 공지를 마련해 처음으로 陵洞齋舍(능동재사)를 創建(창건)하였다. (永嘉誌墓條) |
황남동 숭혜전(미추왕, 문무대왕, 경순왕을 모신 사당 |
4) 太師廟實錄(태사묘실록) 高麗成宗(고려성종)2년(서기983년) 三太師의 祭祀(제사)를 安東府(안동부)에서 지내고 朝鮮(조선)中宗(중종)37년(서기1542년) 안동부사 金光轍(김광철)과 통판 權鯤(권곤)이 廟宇(묘우)를 세우고 慶尙監司(경상감사) 權轍(권철)이 祭田(제전)을 두고 明宗(명종)10년(서기1555년) 4대명절 祭祀(제사)를 정하였다. 明宗(명종)11년 안동부사 權紹(권소)가 祭田을 더하고 明宗(명종)18년 안동부사 權應挺(권응정)이 廟廷(묘정)에 碑(비)를 세우고 宣祖(선조)18년 권호문(權好文)이 都有司(도유사)로서 四時節祀(사시절사)를 2月, 8月 中丁日(중정일)로 정하였다. 光海(광해)5년(서기1613년) 경상감사 權昐(권분)과 경주부윤 權泰一(권태일)이 廟(묘)를 건축하고 묘호를 太師廟(태사묘)라 개칭하였다. <賢奉 權景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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