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莊公 都元帥 權慄 梨峙大捷祭 第418週年 권율도원수 이치대첩제 봉행 - 관리자 2010/10/04 > 권문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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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莊公 都元帥 權慄 梨峙大捷祭 第418週年 권율도원수 이치대첩제 봉행 - 관리자 201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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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855회 작성일 12-04-3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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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 육전 대승전지”
지난 8월26일 화요일. 10시에 충남 금산군 진산읍 묵산1리에 소재한 이치대첩지 (충장사 사당)에서 금산군이 주최하고 이치대첩 기념제 추진위원회에서
주관한 박성철 금산군수, 김복만 금산군의회의장, 진산유림 박찬웅대표, 그리고 중앙종친회 권경석 사무처장, 권성기 금산 종친회장, 지역대의원, 기관단체장 지역유림대표, 후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장공 권율 도원수 제418주년 이치대첩기념제”가 엄숙히 봉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오전10시 정각에 금산군 이병성 문화공보관광과장의 사회로 경과 보고와 내빈소개가 있었다. 이어서 제례에 들어가 초헌관 박동철 금산군수, 아헌관 김복만 금산군 의회의장, 종헌관 박찬웅 진산향교 전교, 집례에 김병례씨, 대축 신정교씨, 진행 집례해설은 문진순씨에 의해 제전 행사를 엄숙히 봉행하였다.
제1부 제례행사가 끝난후 기념제 행사에는 금산군 문화공보과장이 경과보고에서 “이치대첩기념제는 임진왜란 육전3대 대첩중 최초의 육전 승전지인 역사적 의의와 충장공 권율 도원수님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기념제입니다”.라고 서두에 먼저 보고후 현 이치 대첩비의 유래는 서기 1886년 금성면 상가리에 「이치 대첩비와 대첩사」를 세웠으나 1944년 6월 일제가 항일 유적 말살 정책으로 폭파 되었고 새로이 1963년 진산면 거주 모임인 흥산사에서 임야 1ha에 권율장군 후손과 금산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오대산 자락 복지골 명당자리인 현위치에 재건립하였고 현 이치대첩비는 1984년 5월 7일 충남 도문화재 자료 제25호로 지정되고 사당등은 2000년 9월20일 충남도문화재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받아 관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어서 박동철 금산군수는 인사말에서 “이치대첩의 역사적 고증을 거쳐 국가 사적비로 지정을 받아 지역금산을 성역화 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이치 대첩이 우리에게 준 역사적 교훈은 임진왜란 1592년 7월 20일 광주 목사 권율이 이끄는 관군, 의병 1,500여명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장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이끌고온 1만여명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가는 관문인 대둔산 자락에서 왜적을 차단하는 전투로써 임진왜란 육전3대첩중 최초의 육전 승전지이며 초기 전세를 뒤바꾸는데 크게 기여한점이 높이 평가되고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권율을 광주 목사에 임명, 호남지역을 사수토록 하였다. 당시 권율은 1천오백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결전 전장지역인 이치(대둔산)을 선택했는지 군사적으로 지형을 분석 해볼때 금산에서 전주로 이동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유일한 접근로이며 가파른 협곡 으로 천혜의 방어 요새진지를 아군이 선점하여 확보한다면 적은 병력으로 왜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천혜의 지형이었다.
공은 아군의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유리한 지형을 잇점으로 적의 접근로에 방책을 설치하고 장졸들의 전투의지 고양{高揚)을 위해 “오늘의 싸움은 진격만 있을뿐 후퇴는 없다.” 고 하므로써 결사항전의 의지를 굳건히 하였으며 이러한 중요한 지형을 선정한 것은 전장에서 가장 중시하는「전투 의 원칙」을 꿰뚫어 직관하여 비범한 전술,전략적 식견을 두루 갖춘 지장(智將)이였으며 이후 전투과정에서 권율은 진두지휘로 장졸들의 전투의지를 고양 하므로써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공은 전투가 끝난 후 몸소 장졸들 시신을 거두고 제사를 지내주는 모습 등을 볼때 문관출신으로써 용장(勇將)이며 덕장(德將)임에 틀림없다.
이에 앞서 공은 지난번 왜군이 2진으로 올라와 한성(漢城)이 함락된 뒤 전라도 순찰사 이광 (全羅道巡察使 李洸)과 함께 한성 수복을 위해 함께 진군하였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에 이르러 공은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과 싸워 병력을 소모해서는 안되며 또 적은 이미 험한 곳을 점령하였으니 형세(形勢)가 쳐다보며 공격하기에는 어렵고 지금 전라도의 군사를 쓸어서 구원하러 들어가는데 국가의 존망이 이 한걸음에 있으니 한강을 건너서 임진(臨陣)을 막고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 (軍糧米)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확보 한다음에 편리한 형세를 얻어서 예기(銳氣)를 기르고 틈을 엿보아 조정의 명을 기다림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장(主將)인 이광(李珖)은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여 대패하고 선봉장 이지시(李之詩), 백광언(白光彦)등 여러장수들이 전사하였으나 오직 권율만이 군사(軍士)를 온전히 유지하여 현 이치(梨峙)에서 또다시 배수진을 펼쳐 지난날의 기세등등한 왜군들의 정예군을 완전 격멸시킨 통쾌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 대첩의 전승으로 당시 전 전역에 사기가 충천하여 전세여건이 뒤바뀌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장군이 전라 좌수영을 확보함으로써 명량, 노량해전의 대승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음을 우리 권문은 물론 전국민이 알아야 할것이다.
전투가 끝난후 선조왕( 宣祖王)에게 올리는 칙서(勅書)내용에는 “ 전투가 끝난 이치(梨峙)계곡의 풀과 바위에는 피가 낭자 했고 산과 들에는 피비린내가 가득 하였고.(중략) 적의 시체는 80여리 까지 딩굴어 있었으나 우리군사는 죽은자가 11명 뿐이었습니다.” 라고 보고 되었다.
따라서 이치전투의 대승의 계기로 육전에서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점에서 전사상(戰史上) 의의가 크며 이후 독산성 전투와 행주대첩에서 연전연승하여 도원수(都元帥)직에올랐다.

이어 제1부 제례(祭禮), 기념행사에 이어 기념공연 행사가 30분간 충장사 대첩비 앞뜰에서 힘찬 고르예술단의 (문근성 외 9명) 승전고를 시작으로 당시의 승리를 축원과 함께 당시 장졸들의 용감무쌍한 기상과 전투에 임하는 창,검 대련술 등 당시의 무예를 표출하였고 끝으로 당일의 행사를 정리하는 천지인 소리 (모듬 북 합주)연주로 그날의 승리에 정신과 금산발전을 축원하는 연주로 공연이 끝나자 참배한 관중들로부터 힘찬 박수를 받았다.
행사후 금산읍내 지역종친 (시온 농약사 대표 권오영)씨가 지역 선조님의 숭고한 위업을 숭배하면서 당일 행사오신 모든 참배객에게 거금100만원을 식사, 다과 일체 접대를 개인이 제공하였다.
한편 금산군 종친회장 권성기는 매년 지역 연례행사로 선조님 위업에 대해서 행사시 마다 종친으로써 가슴 뿌듯한 반면 매년 지역내 연례행사로 행사 비용등 재정적 어려움으로 아쉬움이 많아 부담을 느꼈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따라서 해당 문중에서는 적극적인 후원과 많은 족친이 참제하여 위대한 선조님 위업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주최측에서 말 하였다.(권범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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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 기념제가 8월26일 진산면 충장사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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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 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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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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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행사 승전고와 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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