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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나에게 화폐발행권을 준다면 법은 누가 만들어도 상관없다'

작성일 17-09-17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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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권도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3,42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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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나에게 화폐발행권을 준다면 법은 누가 만들어도 상관없다'라고 말한 가문

전 세계 화폐발행권(발권력)을 가진 가문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Mayer Amschel Rothschild, (1744년 2월 23일 – 1812년 9월 19일)은 독일의 유태인 은행가이다. 오늘날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를 만들었다. 2016년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 현재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으며 제대로 된 접근 자체도 불가능하지만,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빈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을 약 50조달러(약 6경원, 6만조원)로 추정했다.

 

전 세계 100경원의 자산을 보유한 로스차일드권 패밀리

가문자산(로스차일드) 7경원 전체자산(로스차일드패밀리) 100경원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지역에서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가 태어났다. 마이어의 아버지 암셀 모세 바우어는 골동품상과 대금업자였다.[1] 가문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은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때 부터였다. 마이어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다.

워털루 전투[편집]

로트실트 가문은 워털루 전투로 상당한 부를 쌓으며 발전을 했다. 로트실트 가문에서는 전쟁이 발발할때 산업 스파이를 보내어 프랑크푸르트-파리-런던--나폴리로 이어지는 정보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정부의 정보 즉 워털루 전투가 영국군이 이겼다는 정보보다 1일이나 앞선 날에 사람들을 향해 영국군이 졌다하며 소리쳐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덜 손해보기 위해 영국 국채를 팔기 시작해 영국 국채가 이전의 5%밖에 안되는 상황 이였을때, 로트실트 가문은 그 즉시 모든 국채를 사들였고 그 다음날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이 패배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로트실트 가문은 20배나 되는 이득을 챙겼다.(또한 살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남북전쟁때 군수물자를 지원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이야기가 루머라는 주장이 오히려 로스차일드 가문이 퍼뜨린 루머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관한 보다 디테일한 정보는 '쑹훙빙' 저작인 화폐전쟁 1편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 또한 오리지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에 대한 근거로 일본의 반핵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의 1986년 저작물인 [제 1권력(원제; 億万長者はハリウッドを殺す)]에 이은 국제금융사슬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자본가들에 관한 [붉은 방패 - 로스차일드의 수수께끼(赤い楯 - ロスチャイルドの謎)](한국에는 출간되지 않았다.)가 이미 출간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돈을 자유롭게 벌더라도 최소한의 도덕은 갖춰야 한다."

- 애덤 스미스(1723~1790)

"내 아들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전쟁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없어질 것이다."

- 구들 슈내퍼(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1744∼1812)의 아내)

"한 나라의 정부가 은행가의 돈에 의존하면, 정국도 정부 지도자가 아닌 은행가가 장악하기 마련이다.

돈주머니를 쥔 쪽이 아무래도 돈을 쓰는 쪽보다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돈에는 조국이 없다. 금융재벌은 무엇이 애국이고 고상함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 나폴레옹(프랑스 황제, 1769.8.15~1821.5.5)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계금융시장을 주도하면서 다른 분야도 거의 장악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지역 전체의 재정 수입을 담보로 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유럽 모든 국가의 국왕과 정부 각료가 이들 영향력 안에 있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영국 수상, 1804.12.21~1881.4.19)

"금권(화폐)권력은 평화시에 국가를 잡아먹으려 하고 역경의 시기에는 반역을 꾀한다.

그것은 군주제보다 더 포학하고, 독재보다 더 거만하며, 관료제보다 더 이기적이다. 나는 가까운 미래에 나를 무력하게 하고 내 조국의 위험 앞에 떨게하는 위기가 닥쳐올 것을 알고 있다. 기업이 왕좌를 차지했다. 타락의 시대가 뒤따를 것이고, 재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공화국이 파괴될 때까지 금권(화폐)권력은 대중에게 피해를 끼치며 그 권세를 확장할 것이다. "

- 에이브러험 링컨(미국 대통령, 1809.2.12~1865.4.15)

"경쟁은 대립하는 자본가의 수에 정비례하며 대립하는 자본가의 규모에 반비례한다.

경쟁은 언제나 수많은 작은 자본가의 몰락으로 끝난다. 이들이 보유했던 자본의 일부는 정복자의 손에 넘어가며 나머지는 소실된다."

-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1818~1883), 『자본』

"이 독특한 조직은 구성원으로 보나 행동의 동기로 보나, 철저한 영리 이익이라는 사적 이해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로스차일드(Rothchild) 가문'은 어느 한 정부에 종속되는 법이 없었다. 이 가문의 여러 가족은 서로 다른 나라로 퍼져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단일한 가문으로서는 국제주의라는 추상적 원칙을 몸소 체현하는 것이었다. 이 여러 가족의 충성을 찬 몸에 지닌 단일한 기업으로서의 로스차일드가 제공하는 신용이야말로 당시 급속히 성장하던 세계 경제의 산업 활동을 정치 영역의정부와 잇는 초국가적 연결 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본다면, 당시에는 한 나라의 정치가들과 국제적 투자가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했고, 로스차일드가 누리던 독립성이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유럽 여러나라의 수도에 둥지를 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치외법권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유대인 은행가들의 왕조야말로 그러한 절박한 필요에 대해 거의 완벽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 칼 폴라니(1886.10.25.~1964.4.23), 『거대한 전환』1장 「백년 평화」 중, 2009

귀족 작위[편집]

1816년, 4형제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1세에 의해 귀족 작위를 받았다. 네이선은 1818년에 작위를 받았다. 그들 모두 1822년 9월 29일 오스트리아 남작의 권리를 수여 받았다. 몇 명은 드 혹은 폰을 귀족의 증거로 인정했다. 1885년에 로트실트 은행 런던 지점의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2세(1840–1915)는 귀족 직함을 수여받았다.

로트실트 은행 사업은 유럽의 산업화 동안 국제적 융자로 높이 발전했고 세계 전역을 걸쳐 철도사업을 후원할때 철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계획을 지지하여 공장에 자금조달을 해주었다. 대다수의 사업은 직접적으로 로트실트 가문의 해상보험을 포함한 자본으로 이루어진다.(1824년)

시오니즘[편집]

로트실트 가문은 이스라엘의 후원자이다. 에드몽 자크 드 로쉴드 남작은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리숀레지온의 첫 번째 이민 후원자이다. 1917년, 월터 로스차일드밸푸어 선언의 수신인이었고, 유대인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영국 정부로부터 약속받았다.

제임스 아먼드 드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엘에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이스라엘의 지방법원건물은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후원하였다.[2]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새 지방법원 건물 건축을 후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려고 국무총리 피러스에게 썼던 편지가 국외 대통령 회의실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지점[편집]

막내 아들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1792–1868)는 파리에 지점을 세웠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그는 대다수 철도 건설과 채광 산업의 자금조달 역할을 했다. 자크의 아들 귀스타브 드 로쉴드알퐁스 자크 드 로쉴드는 은행 사업을 계속했고, 모은 돈을 프로이센 왕국1870년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점령한 땅의 반환을 요구하는데 사용하였다. 다음 파리의 로쉴드 가문 세대는 여전히 가문 사업에 집착했고 국제적 투자 은행의 거장이 되었다. 로트실트는 투자 뱅킹 합병 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획득 계약의 톰슨 금융 업계를 이끌었다. 미국에선 그들의 합병 뱅킹 리스트럭처링 그룹은 미국 항공과 델파이의 재정이 곤란할 것 같은 거래를 하였다. 로트실트는 2003년년에 영국 친척이 개인의 탄탄한 회사를 창설하기 위해 공적으로 소유한 프랑스의 로쉴드 뱅킹 하우스가 기인됐다는 사실로 매각한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미국EU의 공적인 상업 뱅킹 거장들로부터 경쟁의 맹습을 받았다.

두 번째 프랑스 지점은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에 의해 창설되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가문의 영국 지점의 소유주인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의 4번째 아들이었다. 1850년에는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가 파리로 옮겨왔고, 표면상 그의 삼촌과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와 함께 일했다. 그런데 1853년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는 지롱드 주보르도 포도주의 생산 양조장인 샤토 무통 로쉴드를 획득했다.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는 사유지를 개명했고, 샤토 무통 로쉴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상표중 하나가 되었다. 너세니얼의 삼촌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 양조장을 획득했다.

파리 사업가들은 1982년프랑수아 미테랑의 사회주의적 정부가 그것을 Compagnie Européenne de Banque라고 개명했을때 죽음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다비드 드 로쉴드 남작이 39세에 오직 세 명의 직원과 자산의 100만 달러로 새로운 Rothschild & Cie Banque의 재건축과 창조를 결정했다. 오늘날 파리의 은행은 글로벌 사업에 상당수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해서 22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지점[편집]

오스트리아 지점 로트실트 가문의 무덤

에선, 살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1820년대에 은행을 청설했고 가족은 존경받는 시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로트실트 가문은 그들의 서비스 때문에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에게서 귀족 작위를 받는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 루이스 폰 로트실트 남작과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은행은 은행의 파산을 막기위해서 미수의 크리 디트 안시 탈트를 떠받쳤지만 제2차 세계대전동안 나치에게 그들의 은행을 내어주고 나라에서 도망쳤다. 그들의 로트실트 궁전들은 나치에 의해 압수되고 약탈당했다. 그들 중 몇명은 미국에 안식처를 찾았다. 1999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에 의해 빼앗겼던 250개의 예술품과 전리품을 로트실트 가문에게 돌려주는 것에 승인했고 예술품과 전리품은 박물관에 보내졌다.

이탈리아 지점[편집]

1861년 이탈리아 통일로 마침내 로트실트 가문은 나폴리 은행사업을 종결했다.

현대 사업[편집]

2003년 7월에 런던과 파리의 은행들이 한 David René de Rothschild의 공동 의장 밑의 Concordia BV라는 마스터 소유 회사를 통해 통합되었을 때 새로운 로트실트 사업 조직의 상관이 재편성 되었다. 이 주장에는 Rothschild et Cie Banque가 로트실트 가문이 다른 어떤곳에서도 N M 로트실트와 런던에 있는 그의 아들을 포함한 AG 은행 통제를 연속적으로 잡고 있을 동안 프랑스와 유럽 대륙의 뱅킹 사업을 컨트롤 한다는 것이다.[3] 로트실트가 2005년에 연속적으로 가지고 있던 AG를 홍콩자딘 메서슨의 보조였던 자딘 스트레직에게 파는 확률은 20%였다. N M Rothschild & Sons는 사업의 대부분을 기업 인수 합병을 해주는 전문가로 일을 하였다. 2006년, 그는 전체적으로 104.9억 달러로 영국 인수합병에서는 2위가 되었다.[4] 2006년 그는 5.5억 파운드 자산 총계와 83.2만 파운드의 세금이익을 기록했다.[5]

자크의 또다른 자손인 에드몽 아돌프 드 로쉴드는 오늘날 세계의 15개국과 교류할 수 있는 제네바에 LCF 로트실트 연합을 창설했다. 연합의 Banque Privée Edmond de Rothschild S.A, La Compagnie Benjamin de Rothschild S.A를 포함한 수위의 사업은 비록 이 그룹이 본래 금융 그룹이지만 특별하게도 자산관리와 개인 뱅킹과 또한 양조 보험을 했고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보르도 양조장을 가지고)농장경영, 아름다운 호텔들과 요트 레이싱도 같이 했다. LCF 로트실트 그룹은 일반적으로 에드몽 남작의 아들인 벤야민 드 로트실트에 의해 통솔되었다.

메이어 암셀 로트실트의 중요한 자손들[편집]

유명한 문화 주석[편집]

로트실트 가문 이야기는 영화의 한장면 같다. 《로트실트의 집》이라는 제목의 1934년 할리우드영화는 George ArlissLoretta Young이 주역이고 메이어 암셀 로트실트의 생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국가 사회주의자(나치) 선전 영화인 불변의 유대인이라는 영화와 1940년에 다른 독일 영화인 Erich Waschneck에 의해 만들어진 죽어라 로트실트(또한 Aktien auf Waterloo라고도 부른다)를 인용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로트실트》는 1818년에 패밀리 부흥역사로 만들어졌고 1971년 토니 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에선 로트실트가 여전히 전통적인 관례로 위험한 건강에 걱정했다. 가문은 또한 가문의 이름을 르네상스 궁전, 금과 돈의 엄청난 사용, Victorian horror vacui의 센스와 미술의 걸작들을 포함한 장식예술의 예술가인 매우 매혹적인 생활 스타일을 사는 le goût Rothschild에게 빌려주었고, Le goût Rothschild는 내국의 로버트 데닝, 비센트 가브리엘 Fourcade와 같은 디자이너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로스차일드 가는 세계 곳곳에서 거대 금융재벌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로스차일드 가가 소유·운영하고 있는 금융그룹은 크게 3개의 분야로 나뉜다. 첫째는 스위스에 본사가 있는 에드몽 드 로쉴드 그룹(Edmond de Rothschild Group)으로, 부유층들의 자산 운용을 담당하는 에드몽 드 로쉴드 민간은행(Banque privée Edmond de Rothschild)과 와인 생산농장을 운영하는 에드몽 드 로쉴드 남작 양조회사(Compagnie Vinicole Baron Edmond de Rothschild) 등을 보유하고 있다. 둘째는 프랑스 파리에 본사가 있는 로스차일드 그룹(The Rothschild Group)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은행들인 로쉴드 은행(Rothschild & Cie Banque)과 엔엠로스차일드앤선즈(N. M. Rothschild & Sons) 은행, 부유층의 프라이빗 뱅킹과 기업의 인수·합병 등에 대한 자문 등을 담당하는 로스차일드 은행(Rothschild Bank) 등을 거느린 금융지주회사이다. 셋째는 투자신탁 업무를 담당하는 알아이티캐피털파트너스(RIT Capital Partners)이다.

한편, 로스차일드 가는 이스라엘의 건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시오니즘 운동에 자금을 지원해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발표한 밸푸어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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