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 문순공(文純公) 수암 상하(遂庵 尙夏)종보제473호(2014.11.1) > 시중공,검교공파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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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문순공(文純公) 수암 상하(遂庵 尙夏)종보제473호(20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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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907회 작성일 14-10-2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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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선생은 호는 수암(遂庵)또는 한수재(寒水齋)이며 화천군(花川君 )7대손으로 선고(先考)는 육유당(六有堂) 증 영의정()이다.

 

1. 한수재(寒水齋) :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공은 1641년 한성의 동현에서 출생하여 조모슬하에 양육되었으며 위로는 율곡(栗), 사계(沙溪), 우암(尤庵)으로 전수된 도학의 계통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강문(江門) 8학사를 양성하여 호락논변(湖洛論辯)의 새로운 성리학의 터전을 마련한 순수 유학자 이셨으며 평생 학문의 길로 정진함과 동시에 의리정신(義理精神) 실천에 앞장섰다.

7세부터 조부 부사공을 따라 9세에 여산의 관아에서 조부가 송사를 검토하는 중 공이이것은 위조일 것인데 왜 확인해보지 않으십니까?” 하여 부사공이 관련자를 힐문하니 사실임이 들어났다. 18세에는 부사공이 영주로 부임하였을 때 제민루(濟民樓)에서 강태공의 세상 건지는 법을 큰소리로 읽다가 제갈량의 양보음을 길게 읊었다. “내 나이는 강태공처럼 80도 못 되었는데 무슨 일로 눈물흘려 옷깃을 적셔야 하나 代讀太公法 長呤梁甫呤 吾年未八十 何事淚霑禁효종의 북벌대계에 대한 자신의 강개한 심경이다. 공은 율시(律詩) 한 수를 읊으니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판에 새겨 누각에 걸었으니 어릴적 부터 문장에 남달리 뛰어난 면을 보여줬다.

[嶺南形勝濟民樓 千古騷人幾此遊 十里空湖開玉鏡 數聲長笛送淸秋

黃花白酒天涯客 紅樹靑山郭外洲 角罷官門人已散 月輪移在鶴峯頭

영남 땅의 좋은 경치 제민루라 이름한 곳 천고의 시인 묵객 몇몇이나 노닐었나십리 훤한 호수 옥 거울이 열리었고 두세 가락 긴 젓대 맑은 가을 보내오네천애(天涯)의 나그네는 황화 백주 즐기고 성 밖의 모래톱은 홍수 청산 고와라나팔 울린 관가 문에 사람들은 흩어지고 둥근달이 옮겨와 학봉 머리에 두둥실]

20세를 넘어 송동춘(宋同春), 송우암 두 거유(巨儒)를 배알하고 사사(師事)하게 된 것은 후대 성리학에 대한 중요한 계기였으며 이후 수차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였다.

2. 수암선생 거처


공은
22세에 진사시를 보고 강릉에 다녀오는 길에 제천에서 우암 송시열을 배알하였다. 23세 시에는 성균관에 들어가면 여러 명사들이 모두 높이 받들었고 무릇 선비들 주장이 분분할 때는 공에게 물어 정하였다. 공은 28세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응시하였고 1674년 화양동으로 가서 우암(尤庵)을 배알하고 선고(先考)의 비문(碑文)을 청하였으며 주역을 강론하니 우암이 듣고 정명(精明)함을 극찬하였다.

공은 31세에 우암의 신변소(伸辨疏)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우암이 원지에 유배되니 공은 세상의 뜻을 버리고 황강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거처하는 집을 수암(遂庵)이라 하였다.

공은 39세에 음양오행도설해와 태극설을 짓고 아우 상유(尙游)에게 보여 주면서 성리학의 강론을 하였다.

42세에도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안했다.

46세에 사헌부지평으로 제수되었으며 10월에 통정대부 호조참의로 제수되었다. 10월 황강(黃江)에 한수재(寒水齋)를 낙성하였는데 우암이 한수(寒水)라 명명하고 편액을 써주었다. 11월에는 동쪽 강안에 열락재(說樂齋)를 낙성하였는데 현재는 자취를 찾을 길 없다.

56세에 공은 누안서원에 우암의 眞像을 봉안하고 尤庵先生畵像讚을 지었다.


3. 황강영당 : 한수재 내


4. 후면에서 본 황강영당


숙종23년 사헌부집의로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는데 임금이 이듬해 別諭를 내렸다. 이르기를 비답에 거듭 내 뜻을 보였건만 하심을 돌리지 못하니 어찌할지 모르겠도다. 산속에 있는 선비들이 의관을 입고 나와야 하거늘 하물며 대대로 록을 먹은 신하이리야, 번연히 도()에 올라 나의 미치지 못한 바를 보완하고 세자를 도우라하였으며 10월에 통정대부 호조참의로 제수하였다. 숙종31년 공은 65세로 대사헌(大司憲)에 배수되고 곧이어 이조참판으로 이배되었으며 鄭松江의 묘표음기를 지었다.

숙종38년 공은 72세로 자헌대부로 승차하여 한성판윤에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제수되었으며 75세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배수되었다. 77세에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에 배수되고 이어 左議政으로 승차되었다. 79세에 평안도 화사(畵師) 金振汝가 공의 초상(肖像)을 그렸는데 현재 제천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7. 문순공 묘소 :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


공은 80세에 숙종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전언을 받고 상경하던 중 누암서원(樓岩書院)에서 왕의 승하소식을 듣고 대행왕 만사(挽詞)와 어제시(御製詩)에 화운하였다.

경종1년 공의 3대를 증작(贈爵)하니 선고는 영의정, 조고는 좌찬성, 증조는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이해 881세를 일기로 한수재에서 고종(考終)하니 임금은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館學(성균관 등 학교)에서 공의 위패를 설치하고 애도하였으며 전국 서원에서도 조의를 표하였다. 고종한지 49일 영구를 배로 실어 한수재에서 조돈의 언덕에 장례하였는데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에 있다.

공의 묘갈(墓碣)宋煥基가 짓고 5대손 영의정 문헌공 敦仁이 쓰고 좌의정 閔鎭遠이 전서하였다. 행장은 남당 한원진(韓元震)이 찬하였다. 후사는 욱(), (), ()을 두었다.


6. 수암공, 초당공, 청운공 영정(제천시 공전3리 자양영당 수장고)




5. 한수재 사당


선생은 권문 역대 현조 중에 서원(書院)에 배향된 수에 으뜸이다.


영조원년(1725) 시호가 내리니 문순(文純)이고 충청도 유생 곽수걸이 서원을 세울 것을 상소하니 영조2년 한수재 옆에 황강서원(黃江書院)을 세워 공을 봉향하고 충주의 누암서원(樓岩書院)에 우암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그후 정읍의 고암서원(考岩書院)에 우암과 함께 배향되었다. 이밖에 예산의 집성사(集成祠), 보은의 산앙사(山仰祠)에 사액으로 영정과 함께 배향되었다. 또 경북 성주에 노강서원(老江書院)과 황해도 송화의 영당(影堂)에도 봉향되었다.

황강영당(黃江影堂)1726년에 세운 서원이며 이듬해 황강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일명 한수재(寒水齋)라고도 한다. 고종8년 서원철폐령으로 송시열, 권상하, 권욱, 윤봉구의 영정을 모시고 황강영당으로 개칭되었다. 이 서원은 원래 한수면 황강리에 있었는데 충주댐 건설로 1983년 현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유고로 한수재집(寒水齋集)을 남겼는데 1434권과 연보가 있고 수암선생은 전국 4개 서원과 3개 사에서 배향하고 있으니 안동 권문 역대 현조 중에 배향수에 있어 으뜸이다.

이 수암사(遂庵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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