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사중공과 제자손(종보486호)2015.12.1 > 기타파 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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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사중공과 제자손(종보486호)2015.12.1

작성일 15-11-1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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給事中公派祖 衡允

  공의 관직은 급사중(給事中)이며 또는 전서(典書)라고도 한다. 고려 문종조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종4품 대중대부(大中大夫) 급사중(給事中) 1인을 두어 임금이 하는 일의 득실을 간()하게 하였는데 중사(中事)로 개칭 하였다가 충렬왕 24년 환칭하고 공민왕 1년 다시 중사로 하였다는데 종 4품 대중대부로 충렬왕, 충선왕조에 전서랑 상서 이품으로 공로가 많았다.

 창은재사 전경과 급사중공 단소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명문기록으로 확인된바 급사중공은 고려 고종 335월에 국학(國學)의 학유직임(學諭職任)에 있다가 특별히 선발되어 사정순(史挺純)이라는 인물과 함께 울릉도(鬱陵島) 안무사(安撫使)가 되어 나갔다. 이때는 그 종형(從兄) 추밀공 휘 수평(守平)이 국가추요(國家樞要)의 현직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있다가 졸하기 4년 전이 되고 충헌공(忠憲公) ()가 례빈소경 송언기(宋彦琦)와 함께 사헌대(司憲臺)어사(御事)로 신흥 몽고제국에 공헌사(貢獻使)로 파견되는 고종 27년 후가 되었다. 이로서 공은 충헌공과 동시대인으로 추정되지만 복야공 수홍(守洪)의 손자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정미보에 복야공의 손행(孫行)에 입록된 것은 오류이고 공이 처음 대동보에 입록된 것은 영조 10년 갑인보 별보에 계대 미상이라 하였으며 1985년 안동의 태사묘 숭보당에서 8세 이여(利輿)의 자 동정 배융교위(同正 陪戎校尉) ()의 아들 형윤(衡允)으로 급사중파조로 확정하였다.



급사중공 형윤 단소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항재로 274-6)

급사중공 단소는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행정리에 23세 창은공(蒼隱公) 종길(宗吉) 후손의 세거지로써 횡성종친회에서 2002년부터 대구,성주,청송 등 각처 후손들이 공론하여 2009년 창은공 재실 언덕에 단소를 설단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급사중공 신도비

또 단소 계하에 11세 보승별장 절(), 12세 검교별장 서(), 13세 부사 석화(碩和), 14세 통덕랑 전의시사 언신(彦臣), 16세 진보현감 자용(自庸), 17세 효량(孝良)의 유허비를 세웠다.

 

15세 직장공 명리(直長公 明利)


11세 절,12세 서,13 유허비


14,16,17세 유허비


조선조에 사옹원 직장동정이 되었다. 안동 영가지에 안동부 동문밖 용흥리에 세거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능과 기량이 특이하였으며 18세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심산에 들어가 심신을 수련하는 중 한 여자를 만나 재상가의 처녀인지라 남매의 의를 맺고 산막에 거처하며 내외를 분별히 하였다. 그 후 처녀를 부모에게 돌려보내니 부모가 아내로 주려하니 공이 남매의 의를 맺었으므로 그럴 수 없다 하고 사양하였다고 한다. 공은 우왕 3년 난을 피해 청송으로 옮겨 안덕에 시거하였다. 묘소는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 지동이며 대록(大麓)의 제2고분으로 사방석장분이다.

직장공의 아들은 자용(自庸), 자공(自恭), 자성(自誠)이 있다.


자용
(自庸) 세종실록에 세종 10년 안음현감, 15년 청하현감, 23년 진보현감에 배하였다. 장락원정으로 추증되었다.

자공(自恭)은 사직이며, 자성(自誠)은 세조 1년 실록에 돈용교위로서 좌익원종공신이다.

직장공의 손은 효온(孝溫), 효량(孝良), (), ()이다.

효량(孝良)은 생원이고 세종 20년 문과급제하였다. 집현전 학사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이고 서울로 이거하였다.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사후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후사는 양()이다.


18()


 18세 상 묘소(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서울에서 성주로 이거하였다. 후에 자손이 귀히 되어 공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수여포에 있다. 후사는 희증(希曾), 희안(希顔), 희맹(希孟)이다.


수암공
(水庵公) 희맹(希孟)

호는 수암이고 성종 3년에 출생하여 연산군 사마시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중종 2년 별시문과 급제하고 정난공신 3등에 올랐다.
 



19세 희맹 묘소(문방리 선영 아래)

중종 7년 성절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홍문관 정언,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중종 11년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재직시 치적이 현저하여 관찰사의 표창을 받고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사되는데 치상하였다. 중종 16년 장락원정으로 가자되고 동 18년 형조참의(刑曹參議), 중종 19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재임 중 병으로 사직하고 귀로에 영월에서 졸하니 수 53세였다. 묘소는 경남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선영 하에 있다. 문형(文衡) 인재 홍섬(洪暹)이 비문을 짓고 판교 박영이 전하였다. 후사는 응정(應挺), 응창(應昌), 응득(應得), 응인(應仁)1녀를 두었다.



20
묵암공(黙庵公) 응정(應挺)

공은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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