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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巖公 諱 龍見과 4孝行 4旌閭(종보454호 2013년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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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506회 작성일 13-03-2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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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암공 휘 용현 사효행 삼정려


월암공은 충헌공(忠憲公) 중달(仲達)의 12대손이고 감정공(
監正公) 집덕(執德)의 10세손이며 진사 계복(繼福)의 8세손이다. 고조는 순(詢)이고 증조는 세형(世衡) 조부는 식(栻), 선고는 죽계공(竹谿公) 응경(應慶)이다.

공은 인조 10년 출생하여 효행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었는데 유독 소학을 즐겨 읽었다. 가정이 청빈하여 농경을 하면서 죽계공이 전염병으로 임종시 단지 수혈하니 수십일 을 더 생존하였다. 공의 지효가 계문되어 나라에서 그 마을에 세금을 면세케 하였다.


사진1 경행재 (창원시 진전면 오서리)경남 문화재자료 제132호


모부인이 하세하자 여묘(廬墓) 3년을 하고 집안에서 여묘를 철거하려 하자 공은 어머님 명을 어길 수 없어 여묘를 못해 한이 남았다 하고 3년을 더 하여 읍지에 기록되었다.

공은 제자들과 소학을 강론하면서 만 번을 독파하지 않으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성현의 글을 읽는데 효제(孝悌)를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글을 읽지 않음만 못하다고 하였다. 또 여러 자질(子姪)들과 분가하지 아니하고 화목하여 교화(敎化)가 있어 고을 사람들이 이 집의 정경을 화폭에 담아 병풍으로 만들었으며 원근의 사대부들이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였다. 나라에서 수직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직을 내렸다. 공은 숙종 40년 83세로 고종하니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이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유태좌(柳台佐)가 묘갈명을 지었으며 회계서원(檜溪書院)에 배향하였는데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서당으로 바뀌었다.

사진2 회계재 죽곡리 회동


회계서당기에 “서당은 진해현 죽곡리 회동에 있는데 증 이조참판 월암(月巖) 권공의 향례를 드리던 곳이다. 사림의 공론이 일어 공의 행의(行義)와 학문은 한 지방의 자랑이라 하며 마땅히 서서원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하여 서원을 세웠으니 신축년(1841년)이다.” 하였다. 또 “수암(遂菴) 권문순(權文純)도 그가 천생 효자라고 탄복하였으니 이것 만 보아도 진실로 의(義)를 행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사진3 회개재 삼문


조정에서 다시 정려(旌閭)하고 증직하며 사림이 향사를 드려야 한다는 중론이 하늘에 미치고 인간을 감동시켰다. 비록 남긴 글은 흩어져 실적을 볼 수 없지만 학문은 실행이 중요하므로 어찌 달리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며 신명(神明)에 통하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니 진실로 효심이 없으면 겉으로 보이는 것은 거짓이다. 이 서당이 한 지방의 자랑이며 남이 감모(感慕)하는데 어찌 자손의 사모함이 묘소에서 제사드리는 데만 국한되겠는가.”하였다.

사정려각(四旌閭閣)


사진 4 효열각 (진전면 오서리 보강산)


창원시 진전면 오서리 보강산 아래에 사정려각(四旌閭閣)이 있다. 통훈대부 사간원 정언 김인섭(金麟燮)이 지은 정려각기에 “진해현 바닷가 권씨들이 대대로 살며 후손들이 부지런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것은 선조들의 덕과 공이 크기 때문이다. 숙종조에 월암 용현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어질고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여 중국의 장공예(張公藝)와 같은 덕이 있었다. 조정에서 듣고 부역을 면해주고 사당을 지어 향사를 받는 사실이 삼강편(三綱編)과 읍지에 실려 있다.


사진5 권용현 4정려


증손 정래(正來)와 현손 중엄(重儼)에 이르러 부자가 또 효로서 조정에 알려져 모두 동몽교관의 증직을 받았다. 고종 7년 선비들이 임금에게 청하여 월암공 이하 3세에 정려를 내리고 그 세손 석(奭)의 부인 박씨의 열행도 정려(旌閭)를 받게 되었으니 천지에 빛나고 원근에서 감동하였다. 오직 효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큰 도리이며 효와 어버이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자식이 되어 효도(孝道)를 다한다는 것은 본래 사람의 성품에 있는 것이다. 공이 스스로 소학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선사(先師)의 행실을 좆아 효로서 3세를 이어 행적으로 전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렇게 하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에 효자불궤영석이류(孝子不匱永錫爾類)효자는 끊임없이 길이길이 복을 받으리라 한 것은 다 이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사진 6 정려기문과 이건기


오서리에는 모선재, 요산재, 서계재, 경행재, 비산재, 죽산재 등 많은 유적이 있고 이곳의 입향조인 월암공의 자손들은 대실권씨(大谷權氏)라 부르고 있는데 4진사(進士) 8문장(文章) 4효열(孝烈)을 배출한 월암공(月巖公)자손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문과를 한 네분은 방열(邦烈), 뢰(
土耒), 후(土厚), 용한(用漢)이고 8문장은 우열(宇烈), 탁열(卓烈), 성열(聖烈), 의열(宜烈), 병열(秉烈), 길(土吉), 석준(錫準), 재고(載皐), 후(土厚) 이며 효자는 정래(正來), 중엄(重儼), 규열(奎烈), 방희(邦熙)이다.


사진7 월암공 묘소


공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시망(時望) 차자는 시중(時中), 3남은 시제(時齊), 4남은 시일(時一)이다. 27世
시망(時望)의 계자는 기(璣)이고 기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정래(正來)와 양래(亮來)이고 시중(時中)의 아들은 형(珩)과 구(玖)이며 형의 아들은 봉래(鳳來)이며 구의 다섯 아들은 홍래, 종래, 흥래, 달래, 명래이다. 시제(時齊)의 아들은 찬(瓚)(계자), 집과 선이며 손자는 익래와 임래이다. 시일(時一)은 각(珏)과 규(珪) 두아들을 두었으며 손자는 익래, 필래, 맹래와 몽래이다.


사진8 월암공 묘비

경행재(景行齋)와 효행비

진전면 오서리에 회계서원의 지원 격으로 1867년 3월 건립하여 문중의 재실겸 서당으로 사용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사립경행학교로 사용하면서 신식교육과 민족운동의 산실로서 수많은 애국열사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교재선생, 독립운동의 주역인 권영조, 오봉, 영운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경행재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1985년 등록되었다.


사진 9 권태로 효행비 (진전면 오서리)


죽사(竹史) 권재고(權載皐)가 쓴 경행재기에는 “회계재의 서쪽재의 이름이다. 원 편액은 이사우선생이 썼으나 후에 신익희(申翼熙)손생이 쓴 것으로 바꾸었다. 고종 4년 죽곡의 남쪽에 서당이 되어 학업을 익히는데 편리하였다. 이듬해 회계서원이 철폐되어 그 편액을 이곳에 걸으니 재실은 무릇 6간인데 앞이 탁 트였다.” 라 하였다.


사진10 모선재


오서리 정려각 옆에는 월암공의
장남 시망과 4남 시일을 위한 모선재가 있는데 9세손 기락(奇洛)이 쓴 모선재(慕先齋)중수기에 “고종 갑자년에 3파 후손들이 힘을 합쳐 보강산 아래 재사를 짖고 모선재(慕先齋)라 편액하였으니 이는 회계서원의 사당을 세우기 전 구 편액을 옮겨 걸은 것이라 하고 아! 자손은 누구나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 없겠는가마는 선세의 유업은 후손이 마땅히 전술하는 것인데 세대가 멀면 잊기 쉽고 분열하면 합하기 어렵다. 일가들은 추원(追遠)하고 계술(繼述)하는 도에 뜻을 합하고 선인의 유업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어찌 선조의 끼치신 풍범(風範)과 가르침이 길이 뻗었으니 종중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라 하였다.


사진 11 요산재


진전면 시락리에 29세
필래(弼來)와 그 아들 중억(重億)을 위한 요산재(樂山齋)가 있다. 후손 권재규(權載奎)가 쓴 요산재기에 “진해 죽곡 남쪽 시락산에 두 묘소가 있는데 후손들이 제계할 장소가 없어 출연하여 재사(齋舍)를 창건하고 산의 이름을 따 요산이라 편액하면서 기문을 지었다.”고 하였다.


사진 12 서계재


오서리 탑동 못 옆에 29세
득래(得來)의 묘각이 있는데 공의 자호로 서계재(西溪齋)라 편액 하였다. 하겸진이 지은 서계재 기문은 “공은 어질고 학문이 있었으며 실천하는데 힘써 헛된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자득(自得)하여 항상 스스로 즐겼다. 선조를 받들고 돈목하는 도에 선영아래 재사를 짓고 제답을 장만하여 성묘할 때 종족이 모여 화수의 의를 강론하고 사람의 일은 선조에 근본하지 않으면 후손이 창성하지 못하니 공은 이미 깊이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삼았고 후손은 그 근본에 보답하는 효를 다하였다. 문중이 어찌 창성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오서리에 비산재(斐山齋)가있는데 족손 영운(寧運)이 쓴 기문에 “족질 오진이 그 증조 이하 3대의 묘소를 수호하기위하여 건립하였다. 생각건대 사람의 도리는 효보다 앞선 것이 없고 효도는 추원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므로--중략-- 이 묘의 자손들은 그 묘를 살피고 재사에 들리는 사람은 효제(孝悌)의 마음이 구름처럼 일어나서 장차 반드시 조선(祖先)을 빛낼 것을 생각하고 종족끼리 돈독할 것을 생각하고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물려주는 마음이 끊임없을 것이다” 라 하였다.


사진 13 죽산재


오서리 월안에
죽산재(竹山齋)가 있는데 완산인 이우섭이 슨 기문에 “죽곡리 월안마을은 안동권씨의 세거지이다. 처사공 맹래(孟來)는 영조 경술에 태어났다. 6세손 영택의 배위 전주이씨가 중년에 부공을 여의고 풍진 고해를 겪으며 삼형제를 교육하고 재실을 건립하니 참으로 효손부로다. 인심선덕(仁心善德)은 가법으로 전해왔으니 처사공의 후손이 명사가 많이 배출되고 독립운동의 선봉이 되어 원근에 풍성(風聲)이 진동하였으니 어찌 송죽(松竹)의 청강한 의절이 아니겠는가.” 라 하였다.

권태노효행비(權泰魯孝行碑)

오서리 보강산 기슭에 방희(邦熙)의 효행비는 공이 병든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잠을 자지 않고 간병한지 십여 년 젖은 이불을 직접 빨고 변을 맛보아 병의 경중을 알아 연한 음식을 올리며 힘든 일에 부지런히 종사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자식 된 도리를 다하였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동몽교관의 벼슬이 내리고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모헌공(慕軒公) 정래(正來)와 농계공(農溪公) 중엄(重儼) 정려(旌閭) 유사

공의 휘는 정래요 호는 모헌(慕軒)이다. 증조는 용현이요 조부는 시망, 선고는 기(璣)이다. 공은 영조 경술년 출생하여 14세에 어버이 상을 당하여 예서(禮書)의 의문점을 조객들에게 질문하며 92세의 노모 봉양을 한결같이 하고 노모가 별세하니 거적에서 침식하였다. 자손에 훈계하는 20개 명(銘)을 지으니 모두 인간의 도리였다. 항상 말하기를 “집안이 대대로 화목하고 당내가 함께 식사하니 마을 이름을 효자리라 하니 우리가 어찌 선조의 물려준 뜻을 생각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선조의 묘소아래 집을 짓고 모선재(慕先齋)라 편액하고 도산서원의 법규를 모방하여 선비들에게 거처하며 공부하게 하니 문학이 성대하였다. 공은 순조 기사년 별세하니 향년 80세였다. 철종 병진년 관찰사기 효행을 조정에 보고하니 동몽교관을 증직 받았다. 배위 순흥안씨 사이에 아들 중엄(重儼)을 나으니 호는 농계(農溪)이다.

농계공은 영조 무진년 출생하여 온순한 성격에 가정의 학문을 계승하니 효도로서 칭찬을 받았다. 모친상을 당하여 뼈만 남고 부친상을 당하여 피눈물을 흘리니 조문객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평생 남의 착한 점을 말하기 좋아하고 기상이 온화하였다. 아들 넷을 낳으니 방열(邦烈)은 진사요 의열(宜烈), 우열(宇烈), 규열(奎烈)이다.

자헌대부 형조판서겸 홍문관제학 양천 허전(許傳)이 찬하였다.

또 허전은 농계공(農溪)의 묘갈명에서 고종 원년 관찰사가 효행(孝行)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기사년 동몽교관을 증직 받아서 부자가 계승하여 인륜(人倫)을 다하니 가히 사람의 자식들에게 권장할 만한 일이다. 경오년(1870년) 삼세에게 정려(旌閭)가 내리니 국가의 효자(孝子)를 대우함이 두터웠다.

또 옥산 장복추(張福樞)는 효자 증이조참의 농계권공개갈후식에서 찬하기를 “농계공이 문장과 재화가 성취되어 어려서부터 중망(重望)이 있고 효도(孝道)로서 동몽교관을 증직 받고 정려(旌閭)를 받은 후에 손자 후의 추영(追榮)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가증되었다. 모헌공이 효도와 학문으로 증직과 정려(旌閭)를 받고 월암공(月巖公)이 지극한 효도와 학문으로서 정려를 받았으며 규열(奎烈)이 효행으로 사실이 읍지에 기록되니 한 가문에 네명의 효자(孝子)와 세명의 정려(旌閭)와 세명의 급제자가 있음은 효와 덕행과 문장이 높고 서로 전달하여 명가를 이루었다.” 라고 하였다.

(자료 감수 : 대실권씨 권경모회장, 편술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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