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 순례 14 ] 大司憲公 諱 景祐 痴憲公 景裕 兄弟와 水谷書院(종보 제362호 2005.8.1) > 복야공파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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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14 ] 大司憲公 諱 景祐 痴憲公 景裕 兄弟와 水谷書院(종보 제362호 2005.8.1)

작성일 12-04-3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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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순례 14 ] 大司憲公 諱 景祐 痴憲公 景裕 兄弟와 水谷書院
대사헌공 경우(大司憲公 景祐) 참판공 경희(參判公 景禧) 치헌공 경유(痴憲公 景裕)는 복야공파 충헌공 중달(仲達)의 5대손이고 군수 영화(永和)의 손자이며 광주 판관 질(耋)의 아들이다. 질은 4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경우는 1448년 출생하여 23세에 별시 문과의 병과로 급제하였다.

공은 예문관 검열(檢閱)이 된후 사헌부 감찰로서 천추사(千秋使)의 정사로 연경에 다녀올 때 밀무역을 검찰한 공으로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간신 임사홍의 농권(弄權)을 규탄하였다.


수곡서원전경 :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수곡리

연려실기술에 임사홍이 공의 집에와서 “누가 감히 이런 의논을 냈느냐” 하니 공은 서슴없이 “오직 내가 할 수 있다”하였다. 사홍은 말 한마디도 못하고 물러갔다고 기록되었으니 공의 곧은 성품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묘우인 사당


공은 성종 12년에는 왕비 윤씨 폐출을 반대하다 파직되었다가 동 17년에 복직되고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고 형조참의, 동부승지, 도승지(都承旨)를 두루거쳐 연산군 4년 51세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아우 경유(景裕)가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강릉부 관노(官奴)가 되었다가 54세에 졸하니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수곡리 수동에 장사하였다. 공은 평소 직에 있어 엄정하고 강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감복하고 그의 재주에 탄복하였다.



내삼문


경우의 아우 참판공 경희(景禧)는 1451년 출생하여 세조 14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처 성종9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고 호조정랑을 거쳐 경상도 진휼사 종사관으로 이재민을 구제하였다. 성종21년 동부승지, 좌승지를 거처 성종2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고 연산1년 예조참판에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47세에 졸하였다.

대동기문(大東奇聞)에 의하면 공의 부친이 참판공의 처 김씨를 천출(賤出)이니 버리라고 핍박하였으나 공은 “조강지처(糟糠之妻) 10년, 주야 치성을 다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현달한다 하여도 어찌 포의(布衣)보다 못하겠습니까? 하였고 그 후 왕은 “경희는 공명을 추구하지 않고 불기처(不棄妻)이니 좋은 선비다”라 하였다.





성경재



아우 치헌공 경유(景裕)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14(1483년) 진사에 합격하고 성종1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예문관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성종21년 호당(湖堂)에 들었다. 연산군 1년 외직을 자청하여 제천현감이 되었으나 성종때 김일손과 함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한 글)을 사초(史草)에 기록했는데 이극돈이 사초에서 발견하고 이를 기화로 사림파를 숙청코자 유자광등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공은 두 아들과 함께 참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후 죄가 사면되고 도승지로 추증 되었다. 공은 평소 성품이 맑고 곧아 속사에 접촉하지 않았으며 어느 날 남효온이 집에 들렀는데 달밤에 맞아 밤새 이야기하다 날이 새니 서로를 인식하고 크게 웃었다는 기록이 있다. 무오사화에 치헌공으로 인하여 형 경우도 화를 입었으나 경희는 이미 졸하여 화를 면하였다.




치헌공 경유 묘소

대사헌공과 치헌공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권되고 선조 27년(1594년) 사림(士林)들이 지평현 운계동에 조립, 조무 형제를 숭모하는 사우(祠宇)을 짖고 배향하였는데 효종5년 중건하고 용문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정조 22년(1797년) 지평의 유생 민성유등이 경유(景裕)의 청조탁절(淸操卓節)하고 덕행의절(德行義節)을 현창하여 포증(褒贈)과 서원배향을 청하였으며 아울러 대사헌 경우(景祐) 역시 충과 절의는 천추에 빛나고 백세에 전할 위현(偉賢)으로서 서원에 배향을 청하였고 용무서원 재유(齋儒) 이제현(李躋賢)등 29인은 향현사(鄕賢祠)에 경유(景裕)를 배향할 것을 청하였다.


정조 24년(1800년) 재유(齋儒) 48인이 상언하여 “경유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죽으니 그의 덕행과 문행을 사림에서 많은 선비들이 숭모하여왔으며 자손이 끊어져 수백년간 분향할 곳이 간절하다”고 하였다.


치헌공 경유 단각

영의정 심환(沈煥) 은 “년전에 사림에서 그의 원통함을 외치며 공의가 끊이지 않은지라 사적을 살피고 포증(褒贈)을 바라나이다.” 하니 주상이 그대로 하라 하였다. 이듬해 순조 원년 이직보 판서(李直輔 判書)가 축문을 찬하고 제향하였다. 공은 부제학으로 증직되고 숭봉(崇奉)의 은전을 입었다.

그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22년 지평향교 유림 314명이 선원 복설을 의논하여 대사헌 경우(景祐)와 함께 지평 수곡리에 묘우(廟宇)를 새로 짖기로 하여 1931년에 완공되니 대사헌공과 치헌공을 배향하게 되었다.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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