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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공 휘 준과 제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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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279회 작성일 13-01-2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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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17世로서 태종 5년 8월6일 한양에서 태어나 5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중형(仲兄) 문경공(文景公)의 훈육을 받았다. 공의 고조는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휘 보(溥)로서 고려조 대제학(大提學) 찬성사(贊成事)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내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군되었으며 증조는 충정공(忠靖公) 휘 고(皐)로서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지냈고 영가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조부는 정간공(靖簡公) 휘 희(僖)로서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내고 영가부원군에 봉군되었으며 기로소(耆老所)의 창시 중 수장이다. 부친은 양촌 문충공(文忠公) 휘 근(近)으로서 대제학(大提學)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좌의정에 증직되고 길창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사진1 안숙공부조묘(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공은 세종 4년 18세에 종묘서부승(宗廟署副丞)이 되고 세종 7년 중부령(中部令)에서 송사(訟事)의 무망(誣罔)을 적발하니 공의 지략을 인정받았다. 세종 9년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11년 형조의 도관좌랑(都官佐郞)이 되어 송사를 들어 판정을 내림에 노련하고 시세와 고관의 위압에 추호도 흔들리지 않으니 호평이 났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도둑의 살해사건을 처결함에 있어 “너희가 강도짓을 한 증거가 분명한데 감히 불복하느냐 너희가 처음 일을 의논할 때는 이러이러했고 중간에 일을 꾸미기는 이러이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우가 이러한데 너희가 감히 숨기겠느냐” 하니 도둑이 혀를 내두르며 “이 분이 일찍이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닐까, 어찌 우리가 한 일을 이처럼 자세히 알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사진 2 안숙공 휘준 묘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보임시 경기 각 고을의 전(田)의 품등(品等)을 재조정함에 총명하게 결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군기시부정에 있을 때는 화포(火砲)를 새로 제조(製造)한 일도 있다. 세종 16년 종부시판관(宗簿寺判官)으로 강원, 함길도에 파견되어 흉년에 시달리던 백성을 구원하였다. 세종 17년 형조 정랑이 되어서는 형송(刑訟)이 적체된 것을 명석히 부결(剖決)해낸 일화가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 김창집(金昌集)의 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에 전한다. 공은 약자는 은의(恩義)로 어루만지고 강자는 위엄으로 제압하여 애복(愛服)시키니 칭예(稱譽)하는 바 되었다.

세종 26년 봄 40세에 중형 문경공(文景公)과 더불어 선고(先考) 문충공(文忠公)의 묘를 광주에서 충주의 음죽(陰竹)으로 천장하였는데 문경공이 하세(下世)하니 울며 선묘에 수비(樹碑)도 못 했는데 이루지 못한다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고 비통해 하였다. 가재(家財)가 없이 진력으로 변통(變通)하는 중에 열읍수령을 지내고도 부모를 위해 소현인 음죽현감으로 부임하여 3년 잘 다스리면서 선고(文忠公)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니 보는 이 성효(誠孝)에 탄복하였다. 문종 1년 경기도에 적체된 사옥(史獄)의 경차관(敬差官)으로 특파된 후 문종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죄수에 대한 질문에 호분누석(毫分縷析)으로 상세히 분석하여 답하니 큰 그릇이라 하고 당상관으로 승차하여 승지에 지형조사로 배하였다.



사진 3 안숙공 신도비각


단종 1년에 가선대부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수충협찬정난공신에 입록되었으며 안천군(安川君)에 봉해지면서 전토와 노비 등을 내리니 공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가되지 안했다. 단종 2년 한성부윤(漢城府尹), 호조참판을 거쳐 단종 3년 이조참판, 세조 1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세조 2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정사가 되어 세자를 책봉하는 칙서를 가져와 포상을 받았다. 이어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고 9월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겨울에 공은 함길도 관찰사겸 함흥부윤ㅇ로 나갔는데 임금은 공을 편전으로 불러 “경은 좌우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으나 함길도의 야인(野人)을 어루만짐에 경이 아니고는 불가함으로 잠시 내보내니 가서 공경히 처리하라” 하며 밀지(密旨)를 내렸다. 이듬해 과로(過勞)로 발병(發病)하자 세조는 의원(醫員)을 보내고 소환하여 정헌대부(正獻大夫) 호조판서에 보임하였다. 세조 5년 세조가 풍양의 이궁(離宮)으로 행할 때 대궐을 수직하였는데 병이 심하여 사직하였다. 왕은 온천욕을 내렸는데 공은 민폐가 된다고 사양하였다. 공은 병이 심하여 사직을 상서하니 왕은 ‘호조지사(戶曹之事)는 나라의 최긴급(最緊急)이라 경이 앙성(仰成)키를 바랐으나 중신을 번노(煩勞)케 함이 불가하여 특윤(特允)하노라’ 하였다.


사진 4 안숙공 묘정비


4월30일 고종(考終)하니 향년 55세 였다. 세조는 조회를 거두고 치상(治喪)케 하였으며 시호를 안숙(安肅)으로 내렸다. 공은 품성이 관후(寬厚)하고 총명(聰明)은 절인(絶人)이었으니 관직에서 정도를 지켜 아세(阿世)하지 않았고 형직(刑職)에 임하여 처결함이 신과 같았다. 충효(忠孝)가 깊고 척속(戚屬)에게 인후(仁厚)하고 붕우(朋友)에 신의가 있으며 예복(隸僕)에게 은혜롭고 남을 접대함에 화기(和氣)하며 가사에 염결(廉潔)하니 실로 맑아 호수와 같았다. 공은 자질(子姪)에게 선대(先代)가 청백(淸白)으로 문벌이 번창하여 8대(代)가 경상(卿相)의 자리에 있었으니 복이 지나치면 재앙이 됨을 염려하여 두 아들에게는 몸을 낮춰 과거에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선고묘 우록에 합폄하고 사후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려 양촌 재사내에 부조묘(不祧廟)를 세웠다. 부조묘는 초운 觀植, 송당 丙祜, 만하 泰源, 소촌 孝植이1968년 능안에 사우를 창건하여 봉안하였다.

문중은 1991년 묘소 아래에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하고 18대손 五焄이 찬하였다. 건립위원은 泰萬, 泰安, 仁培. 赫成(발기인), 龍杓, 泰宣, 炳達, 五容, 景晳, 鍾根, 重益. 종회장 榮植이다.


사진5 안숙공의 호구단자(대전시 유형문화재)


근년 안숙공의 호구단자(戶口單子)가 발견되어 대전직할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호구단자란 호적등본과 같은 것으로 40x57cm 장지(壯紙)로 기록내용은 세종 26년 4월18일 한성부 북부 양덕방 거주 권준(權蹲)으로 본인의 3대와 가족관계 노비현황이 기록되었다. 요지는 아래와 같다.

「正統九年 四月十八日 戶口 漢城府 准本府上 戊午年 戶口帳內 北部 陽德坊 00里係戶 朝奉大夫 軍器監 副正 權蹲 年參拾伍 本安東 父 集賢殿大提學 贈諡 文忠公 近 祖 議政府 左政丞 贈諡 靖簡公 僖 曾祖 壁上三韓 三重大匡 檢校 門下侍中 贈諡 忠靖公 皐 外祖 追贈 鷄林府院君 本慶州 妻安人鄭氏 -中略- 一男 惠 年拾伍 二男 應 年拾參 率居婢---拾柒 婢 內隱伊 年參拾捌 奴 世三 年參拾柒 -下略」

후사는 2남6여로 장자는 정산공(定山公) 혜(惠)와 차자는 마전공(麻田公) 염(念)이다.

정산공(定山公) 혜(惠)는 한양에서 출생하여 통훈대부로 출청도 정산현감을 지냈다. 성종 8년 실록에 임금이 경연(經筵)에 임하여 행대호군(行大護軍)권혜 등 5인을 윤대(輪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노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성종 17년 향년 63세로 졸하였다. 묘소는 방축리에서 용인시 기흥읍 하갈리 산75-3 애현으로 이장하였다.

정산공의 후사는 호군을 지낸 한(悍), 사직 예(忄曳), 만오공 구(懼)이며 구의 아들 정지는 호조참의를 지냈다.


사진 6 18세 마전공 휘 염의 묘소


마전공(麻田公) 염(念)
은 세종 5년 한성에서 출생하여 부친의 유훈을 받들어 과장에 나가지 않고 단종 2년 실록에 예빈시녹사, 세조 1년 서령으로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옥천과 마전군수, 괴산군사를 지냈다. 성종 10년 53세로 졸하니 후에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음성 방축리 문충공재사 좌측에 있다. 후사는 결성공 요(憭)와 창수공(倉守公) 억(憶), 음죽공 흡(恰)이다.


사진 7 마전공 묘정비


19世 창수공(倉守公) 억(憶)
은 소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선대의 물부과거(勿赴科擧)를 지켜 과장에 나아가지 않고 군자감부감을 거쳐 광흥창수에 이르렀고 가선대부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고양시 성석동 선산 승지공 묘소 아래에 있다.


사진 8 창수공 재실과 습재공 비각(고양시 성석동)


창수공은 5남매를 두었는데 장자는 승지공 기(承旨公 諱 祺)이고 차자 회(禬)는 사직공에 출계하고 3자 조(祚)는 후사가 없다.

20世 승지공 기(承旨公祺)는 상주목사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올랐으며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추증되었으며 공은 습제공 벽(擘) 과 진사공 별을 두었다.

21世 습재공 벽(習齋公 諱 擘)은 중종 38년 식년시 문과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고 명종 4년 춘추관기주관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가을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진 9 습재공 휘 벽 묘소(고양시 성석동 감내)


명종 6년 감군(監軍)어사(御使)로 관서지방에 나가고 명종 8년 성주목사, 원주목사, 명종 11년 호남(湖南)의 점마어사로 나갔다 돌아와 명종 12년 선산부사로 나갔다. 선조 5년 유성룡 등과 함께 중국사신을 맞는 종사관으로 문명이 중국에까지 드날렸고 선조 6년 당상관이되어 여주목사 장단부사(府使)를 거쳐 형조, 예조참의(禮曺參議)에 이르렀다. 시문이 뛰어나 제술관 종사관을 지냈으며 74세 졸하니 예조참판(醴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고양시 성석동 감내에 해주정씨, 경주정씨와 3위 합폄이고 충남 서천군 기산면 화산서원에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재사에 묘갈비가 있는데 전자체를 선조 39년 명사 주지번(朱之蕃)이 왔을때 석주공이 주지번에게 부탁하여 써 받았다. 습제공은 7남매를 두었으며 장자는 별좌공 우(別坐公 諱 韡)이고 차자는 송화공 인(松禾公 諱 韌)이며 제3자는 송파공 온(松木皮 公 諱韞) 제4자는 초루공 겹(草樓公 諱韐) 제5자는 석주공 필(石洲公 諱韠) 제6자는 수은공 도(睡隱公 諱韜)이다.

19世 결성공(結城公) 요(憭)는 세조 1년 한성에서 출생하여 의금부 경력, 종부시 주부, 개령과 결성의 현감을 지냈다. 묘소는 방축리 선고묘 외백호에 합폄이며 좌의정 신용개가 비문을 지었다. 결성공은 부사공 복(福), 호군공 예(禮), 부호군 상(祥)을 두었다.

20世 부사공(府使公) 복(福)은 성종 9년에 출생하여 연산군 9년 식년시(式年試) 문과 장원(壯元)하였으며 홍문관 전한으로 지제교를 겸하고 수원부사를 지냈다.

복의 3남 신은 명종 7년 식년시(式年試) 병과에 급제하여 명종 14년 어사(御使), 명종 16년 홍문관부교리, 사헌부 집의, 명종 18년 승정원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복의 손자 순(純)도 명종 6년 별시(別試)문과에 급제하고 나주목사와 진주목사를 지내고 졸 후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순(純)의 자 탁(晫)은 의주판관을 지냈는데 백성들이 선조에게 판관을 유임시켜주기를 간청하였다 한다.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순의 차자 엽(曄)도 선조 12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광해군 5년 군수로 해적(海賊)을 잡아 통정대부에 올랐다. 탁의 자 설(渫)도 선조 27년 별시(別試)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 무장현감을 지냈다. 안숙공이 과거를 보지 말라는 유훈이 아들 들에게 미치었으나 손 복(福)이후 후손은 6인이 과거에 급제하는 영예를 안았다.

20世 부호군 상(祥)은 충좌위부호군이 되었으며 아들 옹은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내렸고 옹의 아들 위(暐)는 광해군 5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영산현감을 지냈다.
(자료제공 및 감수 전 안숙공회장 권병홍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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