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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56-2]耆老社之始 檢校門下侍中 永嘉府院君 靖簡公 諱 僖(2)(종보 423호 201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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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959회 작성일 12-07-0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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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 4년 갑신(甲申) 3월에 공이 86세인데 후기영회(後耆英會)를 고쳐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로 보완하고 영의정 치사(領議政致仕) 권 문절공 중화(權 文節公 仲和) 영의정치사 이 문간공 서(李 文簡公 舒) 우정승(右政丞) 성 문경공 석린(成 文景公 石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 문도공 제(閔 文度公 霽)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 익원공 사형(金 翼元公 士衡) 영의정 조 문충공 준(趙 文忠公 浚) 좌정승 하 문충공 륜(河 文忠公 崙)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이 문도공 거이(李 文度公 居易)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 이 익평공 무(李 翼平公 茂) 등 9인과 더불어 영수첩(靈壽帖)에 오르되 공이 수제(首題)되고 또 4子 양촌(陽村)이 후기영회서(後耆英會序)를 지어 영수각에 봉안(奉安)하니 이것이 세칭 권씨사시(權氏四始)의 하나인 기로사지시(耆老社之始)이다.

권성의 사시(四始) 발원비(고양시 성사동)

세칭 우리나라의 사시(四始)가 안동권씨인 정간공(靖簡公)과 그 자손에게서 일어났는데 그 하나인 기로사지시(耆老社之始)는 공의 자행(自行)이고 그 둘인 전문형지시(典文衡之始)는 아들 양촌(陽村)이 얻은 바이며 그 셋 호당지시(湖當之始)는 손자 채(採)의 소업(所業)이고 그 넷 족보지시(族譜之始)는 증손 소한당(所閑堂) 람(擥)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정간공 문관석

태종 5년 을유(乙酉) 12월 19일 신사(辛巳)에 공의 나이 87세로 한양의 집에서 고종(考終)하니 부고가 임금에게 문달(聞達)되자 임금은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태상왕(太上王)인 태조와 금상(今上)인 태종이 다 제사를 내렸으며 왕후인 정비(靜妃:원경왕후 민씨)와 세자(世子:양녕대군)도 사신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시호(諡號)를 정간(靖簡)으로 내렸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 가로되, “희(僖)는 윗사람을 섬기고 직사(職事)를 받드는 데 정성과 믿음으로 속이지 않았고 불교를 신봉하였는데 처음 벼슬을 시작하면서부터 마칠 때까지 한 번도 비난이나 탄핵을 받음이 없었다.”


정간공 신도비와 묘정비

공의 생평(生平)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지극하였는데 충정공(忠靖公)과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의 3남 중 계자(季子)로 태어났으며 극진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낙향하여서는 은일(隱逸)로 지내며 백업(白業:불교의 수신)을 쌓아 베풀기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니 여흥(驪興)의 신륵사(神勒寺)에 장경각(藏經閣)을 일으켜 세우고 오대산(五臺山)의 동대(東臺)에 관음암(觀音庵)을 중창(重創)한 것과 시주(施主)한 것이 헤아릴 수 없다.

다음해 병술년(丙戌年:1406년) 초에 고양(高陽) 성지산(星知山)의 진한국대부인 묘소에 합폄(合窆)하였는데 다시 한씨(韓氏:대부인)에게 특별히 창순택주(彰順宅主)의 시호가 내렸다.

공은 무릇 다섯 아들을 낳으니 장자는 화(和)로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시호가 공경(恭景)이고 둘째는 이기(二己)인데 출가(出家)하여 도승통(都僧統)에 국일사(國一師)로서 남공(南公)의 칭호로 불리고 셋째 충(衷)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여 시호가 평후(平厚)이다. 넷째 근(近)은 호가 양촌(陽村)이고 문형(文衡)에 찬성사로서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에 길창군(吉昌君)으로 봉해지고 시호가 문충(文忠)인데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輔祚功臣)에 좌의정(左議政)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다섯째인 우(遇)는 호가 매헌(梅軒)으로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대사성(大司成)이다.

공경공(恭景公)이 2남1녀를 낳으니 장남 옹(雍)은 평창군사(平昌郡事)이고 다음 질(質)은 창신교위(彰信校尉)이며 여서(女壻)는 경력(經歷) 노상지(盧尙智)이다. 평후공(平厚公)이 5남1녀를 낳으니 장남 존례(存禮)는 상호군(上護軍)이고 다음 숭례(崇禮)는 판전교(判典校) 증(贈) 예참(禮參)이며 다음 함(諴)은 사직(司直)이고 다음 호(護)는 공참(工參)이며 다음 눌(訥)은 부사(府使)이고 여서(女壻)는 직장(直長) 단양(丹陽) 우승경(禹承瓊)이다. 문충공(文忠公)이 4남3녀를 낳으니 장남 천(踐)은 우군총제(右軍摠制)이고 다음 제(踶)는 호(號) 지재(止齋) 문형(文衡) 좌찬성(左贊成) 증 순충적덕보조(純忠積德輔祚)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영상(領相) 시(諡) 문경(文景)이며 다음 규(跬)는 부마(駙馬) 길창군(吉昌君) 절제사(節制使) 시 제간(齊簡)이고 다음 준(蹲)은 호판(戶判) 안천군(安川君) 수충협찬정난(輸忠協贊靖難) 시 안숙(安肅)이며 장녀서(長女壻)는 지중추(知中樞) 시 양경(良京) 한산(韓山) 이종선(李種善) 다음은 목사(牧使) 달성(達城) 서미성(徐彌性) 다음이 판종부(判宗簿) 동주(東州) 최주(崔宙)이다. 매헌(梅軒)이 4남4녀를 낳으니 장남 조(措)는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이고 다음 채(採)는 호당(湖當) 대사성(大司成)이며 다음 기(技)는 참판(參判)이고 다음 안(按)은 현령(縣令)이며 장녀서(長女壻)는 사예(司藝) 인천(仁川) 채륜(蔡倫)이고 다음은 판사(判事) 여흥(驪興) 진유번(陳有蕃)이고 다음은 참판(參判) 진주(晋州) 유종식(柳宗植)이고 다음은 사직(司直) 은진(恩津) 송계중(宋繼中)이다.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 비각

적성 별업 유허비문(積城別業遺墟碑文) 요지

정승 정간공 권희선생 유허비(政丞 靖簡公 權僖先生 遺墟碑)

이곳 백학면(白鶴面) 구미리(龜尾里)의 194번지 일원(一圓)은 구연(龜淵)·수월리(水月里) 등으로 불리던 곳이며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재상(宰相) 안동 권 정간공 희(安東權靖簡公僖)의 별업향저(別業鄕邸)가 있던 자리로서 근자(近者)의 속칭(俗稱)은 권가(權家)터라 이르는 곳이다.

선생은 이 앞 강변의 구미강(龜尾崗) 벽암(壁巖) 중턱에 초정(草亭)을 짓고 강정(江亭) 또는 수월정(水月亭)이라 이름하여 여한(餘閑)에 수시로 올라 시를 지으니 그 당호(堂號)가 저절로 수월정(水月亭)이 되었다. 오남(五男)이 여기에서 성장하면서 강정(江亭)을 독서당(讀書堂)으로 삼아 공부하였다. 선생의 후손에는 명공석덕(名公碩德)과 문무상장(文武相將)이 헤아릴 수 없이 나와 안동권씨의 으뜸가는 화주현벌(華冑顯閥)을 이루었는데 이곳의 지력(地力)이 이를 배양(培養)한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계자(季子) 매헌(梅軒)은 이곳을 기려 명시(名詩)를 남겼다.(오훈 敍)

전압청강후배산(前壓淸江後背山) 일구형승시천간(一區形勝是天慳) 영우세로전휴리(榮紆細路田畦裏) 은영허루수목간(隱映虛樓樹木間) 우율만원공이미(芋栗滿圓供異味) 풍연수처족기관(風煙隨處足奇觀) 오생최한견진세(吾生最恨牽塵世) 차지하당득자한(此地何當得自閑)

수월정 유지비문(水月亭遺趾碑文) 요지

정간공(靖簡公) 수월정 유지(水月亭 遺趾)

이곳은 권희(權僖:1319~1405) 선생의 수월정(水月亭)이 있던 자리이다. 선생은 구미리(龜尾里)에 향저(鄕邸)를 두고 별서(別墅)를 경영하면서 자손이 생장(生長)하며 면학케 하고 이곳에 초정(草亭)을 지어 강정(江亭)이라 부르면서 독서당을 겸하고 만년(晩年)에 수시로 올라 음수영월(吟水咏月)하니 세인(世人)이 이를 수월정(水月亭)이라 일러 그 당호(堂號)가 되었다.

선생의 계자(季子) 우(遇)는 호 매헌(梅軒) 한림제학(翰林提學)으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스승이다. 매헌은 이곳 일대를 읊은 시 15수(首)를 남겼는데 그 가운에 적성구연강정(積城龜淵江亭)은 이 모정(茅亭)에 제(題)한 것이다.

소쇄강변일초정(瀟灑江邊一草亭) 소쇄한 강변에 띳집의 정자 하나

안전가경묘난형(眼前佳景妙難形) 눈앞의 좋은 경치 오묘해 형언을 못하고

미풍욕기파광동(微風欲起波光動) 미풍에 이는 물결 빛을 받아 반짝이는데

세무초비우기명(細霧初飛雨氣冥) 옅은 안개 일어나더니 빗기운에 어두워지네

첩첩청산임석벽(疊疊靑山臨石壁) 첩첩 푸른 산은 석벽에 와 닿고

쌍쌍백조낙사정(雙雙白鳥落沙汀) 쌍쌍으로 나는 백조 모래톱에 내려 않는데

가존만세내이양(家尊晩歲來怡養) 아버님 만년에 여기 와 정양하시니

행아여금득문녕(幸我如今得問寧) 다행할사 내 오늘같이 문안을 드림이여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興神勒寺大藏閣記碑)


신륵사 대장각 기문

목은 이색(李穡)은 공민왕이 승하하자 명복을 빌고자 장경(藏經)을 발간하기로하였다. 그러나 워낙 방대하여 나옹(懶翁)의 제자인 승려 무급, 수봉의 도움으로 전국에서 모금하여 발간하고 고려 우왕 8년(1382년) 정월에 화엄종(華嚴宗)의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식을 마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驪興)의 신륵사<神勒寺:나옹(懶翁)이 입적(入寂)한 곳>에 이르렀다.

신륵사 구룡루 중수비

화산군(花山君) 권공(權公) 희(僖)가 순공(順公)의 감독하에 절 남쪽에 2층 장경각(藏經閣)을 지어 장경을 넣고 돌아가신 그의 부모와 그 아내의 부모를 위하여 금배(金盃)와 재물을 시주(施主)하고 중앙에는 등신(等身)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불상 1구(軀)를 보시하고 보현보살(普賢菩薩) 상과 문수보살(文殊菩薩) 상은 홍의룡과 순성옹주 왕시가 시주 봉안하여 사대부중(四大部衆)이 우러러 예불(禮佛)하는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글은 판도판서 예문관제학 이숭인(李崇仁)이 찬하고 글씨는 제학 권주(權鑄-창화공손자)가 썼다.
 
대장각기 비(후면에 정간공 권희 자가 보인다)

대장각기비는 보물 제 230호이다. <자료: 정간공실기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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