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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44] 樞密公 忠憲公 文淸公 三代(종보 제406호 20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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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653회 작성일 12-04-2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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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순례 44] 樞密公 忠憲公 文淸公 三代
공은 고종 27년(1240년) 12월에 몽고에 다녀왔는데 화평을 교섭하여 변경을 편안케 하였다고 하며 1247년 시랑(侍郞)으로 예의를 가르쳤으며 상호군(上護軍) 정3품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니 왕씨 재상들이 공을 하례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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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공 단소(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
공은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고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추증된 휘 중시(仲時)의 장자로 고려 명종(明宗 1171~1197)연간에 安東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수평은 성품이 순후하고 청렴결백하여 장단(長湍)의 진동(津東)지역에서 우거(寓居)하여 군직(軍職) 대정(隊正)으로 있을 때 낭중인 복장한(卜章漢)이 유배되었을 때 그의 전답이 홍수로 유실된 것을 공이 개답하여 대신 경작하였는데, 그가 돌아오자 그동안의 도조(賭租)를 배에 싣고 가 전답문서와 함께 돌려주었다. 복장한은 감복하여 사절하였지만 공은 놓고 돌아왔다. 목격한 사람들이 탄복하여 「지금 다투고 빼앗느라 죽이는게 풍습이 됐는데 이런 사람도 있다니 믿기 어렵다」하였다.

견룡(牽龍: 위사의 일종으로 장교)에 선발되었는데 사비가 많이 들어 사양하니 사람들이 개취(改娶)한다면 될 것이라 하니 어찌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유한 아내를 구하겠는가”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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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공 추향제(매년 300여명의 후손들이 전국에서 참제하고있다.)

공의 관직은 광록대부(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고 고종37년 졸하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장군(上將軍)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長湍의 천마산(天摩山) 아래 침교(砧橋) 옆 혹은 백자동(柏子洞)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었다.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에 설단(設壇)하였다. 단비문은 22대손 권중달(重達)교수가 짓고 신도비문은 이성도(李聖道)가 지었으며 지명은 24대손 희철(熙哲)이 짓고 행장은 26대손 달안(達顔)이 지었다.




子 忠憲公 諱 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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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공 단소 (진동면 하포리 추밀공 계하)

호(號)는 성재(誠齋) 또는 성암(誠庵)이다. 고려 고종(高宗 1214~1259) 때 동당문과(東堂文科)에 급제하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면서 문한(文翰)을 드날렸다. 공은 정 4품 정의대부로서 판태복시사, 한림학사(翰林學士),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知制誥)를 겸대(兼帶)하였는데 공이 오랫동안 지제고를 하였으므로 의문(儀文)이 공으로부터 나온 것이 많았으며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예설(禮說)에 밝아 지례(知禮)로 세인의 일컬음을 받았다 한다.

공은 고종 27년(1240년) 12월에 몽고에 다녀왔는데 화평을 교섭하여 변경을 편안케 하였다고 하며 1247년 시랑(侍郞)으로 예의를 가르쳤으며 상호군(上護軍) 정3품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니 왕씨 재상들이 공을 하례하였다 한다.

사후 종2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이부사(判吏部事)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추증되었으며 충헌(忠憲)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묘소는 장단군 동파에 있었으나 실전되고 추밀공 단소 계하(階下)에 설단하였다.




孫 夢庵 文淸公 諱 단

호는 몽암(夢庵)이다. 고종 15년(1228년) 출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과인이 따를 수 없이 총명하였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고종 41년(1254년) 27세로 동당문과(東堂文科) 윤정형방(尹正衡榜)에 급제하여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승주(昇州) 등의 부사(副使)를 지내고 내직으로 들어와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을 겸대하고 국자감(國子監)의 좨주(祭酒)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정3품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가 되었으며 시관(試官)으로 재직시 권한공(漢功 복야공 증손) 백이정 등 훗날 재상이 된 이들을 발굴하였다. 52세 때인 충렬왕 5년(1279년)에는 일본정벌을 위해 전선(戰船)을 건조하였다.

충렬왕(忠烈王) 14년(1288년)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사문한학사(密直司文翰學士)가 되고 승지(承旨)를 거쳐 판도판서(版圖判書호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전리판서(典理判書이조,예조)가 되고 충렬왕 15년(1289년)62세에 광정대부(匡靖大夫) 지첨의정승(知僉議政丞)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이 되고 충렬왕 20년(1294년)에 67세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어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겸했다. 71세때는 별판하서제 재신(別判下書題 宰臣)이 되는 영예를 받았다. 충렬왕 27년(1301년)에 74세로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를 겸하였고 외직(外職)으로는 전라.경상.충청 3도의 백(伯)과 4주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백성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동경 유수로 경주에 있을 때 능라(綾羅 주단)를 관아에서 임의로 사용하던 것을 공이 혁파하여 1년분의 세공으로 3년치의 봉공(封貢)을 조정에 보내니 백성들이 칭예가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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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공 신도비

공은 평소 청렴하고 부지런하여 정명(精明)하다는 칭예를 받았으며 검소하고 겸손하였다. 훈채(葷菜)와 고기를 끊은 것이 40년이었는데 자손이 새 옷을 지어 올리면 반드시 입던 의복을 벗어 궁핍한 자에게 주었다.

충선왕(忠宣王) 3년(1311년) 84세로 졸하니 단성양절공신(端誠亮節功臣)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첨의정승(僉議政丞 정1품) 판선부사(判選部事)로 추증되고 문청(文淸)의 시호가 내렸다.

묘지(墓誌)에 공은 학문이 높은 유능한 관리로 양자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풍덕군 덕달동에 있는데 실전되었다가 영조(英祖) 25년(1749년)에 대제학 이진(李瑱)이 지은 묘지(墓誌)를 찾아냄으로써 개봉축(改封築)하고 비를 세웠으며 14대손 좌참찬(左參贊) 창백헌(倉白軒) 적(示啇)이 비문을 지었다.

공의 아들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내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휘(諱) 보(溥)로서 종보 354호에 소개하였고, 손자는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인 창화공(昌和公) 휘 준(準)과(종보 383호에 소개),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인 충정공(忠靖公) 휘 고(皐) 그리고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인 정헌공(正獻公) 휘 후(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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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공 추향제 헌관 및 축관

<현봉 權景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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