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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년경
太師公 墓所(태사공 묘소)와 享祀(향사)

太師公의 墓所는 慶北 安東市 西後面 城谷里) 天燈山 앞에 있으니 造火谷의 子坐이다. 묘 葬事하여 모신지 6, 7백년간 失傳하여 찾지 못하였으나 서기 1470년경에 平昌郡事 17世 權雍(권옹=樞密公7세손)이 安東府사람 吏曹正郞 裵素의 딸과 결혼하여 安東府 豊山縣 河回村에 살면서 與地勝覽을 보다가 始祖 太師公의 묘소가 천등산록에 있는 것은 알았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찾을 수가 없어 地士와 함께 산록을 두루 살피다가 誌石을 발견하고 봉분을 쌓고 장차 碑石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우지 못하고 卒하시니 임종시에 階下에 附葬할 것을 遺言하였다.
1470년
능동천년약사陵洞千年略史 1 (1470년 - 1799년)

太師公 墓所(태사공 묘소)와 享祀(향사)

太師公의 墓所는 慶北 安東市 西後面 城谷里) 天燈山 앞에 있으니 造火谷의 子坐이다. 묘 葬事하여 모신지 6, 7백년간 失傳하여 찾지 못하였으나 서기 1470년경에 平昌郡事 17世 權雍(권옹=樞密公7세손)이 安東府사람 吏曹正郞 裵素의 딸과 결혼하여 安東府 豊山縣 河回村에 살면서 與地勝覽을 보다가 始祖 太師公의 묘소가 천등산록에 있는 것은 알았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찾을 수가 없어 地士와 함께 산록을 두루 살피다가 誌石을 발견하고 봉분을 쌓고 장차 碑石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우지 못하고 卒하시니 임종시에 階下에 附葬할 것을 遺言하였다.

1557년 丁巳
嘉靖 丁巳年(西紀1557年) 安東府使 20世 權紹(檢校公 諱 倜의 9世孫 湖堂 達手의 子)가 陵下에 사는 後孫 權審行 權夢斗 外孫 柳公季를 시켜서 改築할 때 옛 封墳을 파헤치니 넓은 돌이 壙中에 덮혀 있고 子坐午向이었다. 이로부터 해마다 寒食日에 묘소에 祭祀를 奉行키로 하였다
孝宗효종4년(서기1653년) 慶尙道觀察使 24世 權堣(樞密公14世孫)가 묘소아래 공지를 마련해 처음으로 陵洞齋舍를 創建하였다. (永嘉誌墓條)


태사공실기와 능동실기 묘도편이나 모재 김안국(金安國)의 모재장원기에 태사공 묘소(太師公墓所)는 천등산에서 내려와 조화곡(造火谷) 자좌오향(子坐午向)이며 옥녀단좌형(玉女端坐形)에 금차척지혈(金叉擲地穴)이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은 금계(金溪)이니 속칭 검제 또는 능동(陵洞)이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안동부편 총묘조에는 “김선평의 묘는 부의 서쪽 고태장리에 있고 장정길의 묘는 성곡리에, 권행의 묘는 본파곡리(本破谷里)에 있다”고 하였고, 안동읍지에는 “태사 권행의 묘는 본파곡리에 있고 장사 후 능동(陵洞)이라 하였으며” “부사 권소(權紹)가 권심행(權審行) 권몽두(權夢斗), 외손 유공계(柳公季)로 하여금 사초케 하고 한식에 제향을 올렸다.”고 하였다.

태사공의 묘소는 500여년 실전되었다가 1470년 경 추밀공파17세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충주에서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딸을 맞아 풍산현의 하회촌에 거주하면서 여지승람(與地勝覽)을 보다가 시조님 묘소를 알아내고 지사(地師)와 함께 두루 답사한 끝에 지석(誌石)을 찾음으로써 봉분을 쌓고 입석을 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졸하니 임종 시 계하에 장사해 줄 것을 명하였다. 부인 배씨가 먼저 졸하여 계하에 매장하고 그 아래에 평창군을 매장하고 평창공의 아들 유(裕)와 작(綽)은 단갈(短碣)을 세우니 비문은 유의 사위 이종준(李宗準)이 지었다.
그후 유와 작은 평창으로 돌아가고 사위인 호군 증 사복시정 유소(柳沼)가 남쪽에 매장되고 이로부터 유씨가 맡아 수호(世守)하게 되었다.
평창공 옹은 정간공 희(僖)의 장자 화(和)의 장남이다. 공은 목은 이색의 외척 이계린의 추천으로 한산의 지군사로 부임하였는데 역대 군수 중 명군이라 하였으며 평창군사를 끝으로 충주에 우거하였다. 평창공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신숙문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풍산인 유소에게 출가하였으니 평창공이 딸을 공의 처향인 하회의 유소에게 보낸 것이다. 평창공의 아들 이후 4,5대만에 절사되니 외손 유씨가 시조 묘역을 수호하게 되었다.

명종 12년(1557년) 안동부사로 부임해 온 검교공파 20세 권소(權紹)는 태사묘(太師廟)를 중수하고 태사공묘를 정수하면서 위토답을 최초로 마련하였으니 퇴계의 중수기에 상세히 나와 있다. 가첩에는 제곡 1백석을 더하고 비복도 재사에 배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권소는 능동묘제를 한식일에 지내오던 것을 한식과 10월 중정에 추향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명종 21년(1566년) 서애 유성룡(柳成龍) 등 유씨문중에서 정문을 올려 능동묘소를 전수(典守)해 줄 것을 청하였다.

선조 21년(1588년) 22세 충숙공 권극지(權克智)가 경상감사로 부임해 능동묘소를 성배하고 묘갈(墓碣)을 바꾸어 세웠다. 유성룡이 짓고 22세 권오(權晤)가 쓴 묘비문에 선조 21년 관찰사 극지가 순시 차 당도하여 제사를 올렸는데 마칠 무렵 하인이 잘못 비석을 건드려 깨지니 다시 세웠다고 한다.

선조조 능동실기 제영(題詠)에 22세 석주 권필(權韠)이 성묘하고 능동제영이라 시를 지었으니
家牒稿成 題于卷尾
羅王聖骨是吾先(신라왕의 성골이 바로 우리 선조시니)
西始鳴鷄事渺然(시림에서 닭 울던 일 그 자취 아득하다)
錫邑今方三七代(식읍 하사 받은 것이 바야흐로 21대)
開邦舊已一千年(나라 연 지 아득히 1천년이 지났다네)
翰林詞藻風聲遠(한림의 문장은 풍성이 아득하고)
僉議尊榮福慶綿(첨의 존영은 복과 경사 이어졌네)
小子怛然憂失墜(소자는 실추할까 두렵고 근심하여)
錄爲家牒要流傳(가첩으로 기록하여 오래 전하려 하네)
* 태사께서 내게 21대조이니 삼칠이라 했다.

효종 4년(1653년) 경상감사 24세 동곡(東谷) 권우(權堣-추밀공파 정헌공계 충숙공 절(節)의 6대손)가 묘소 우측에 공터를 마련하여 재사(齋舍)를 창건하니 대청 4간에 협실 각 2간과 협실 아래 동서재 각 3간, 정면 4간에 곳간 등 4각형으로 16간으로서 비로소 태사공 묘소를 전수하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1687년 24세 하당 권두인(權斗寅)이 재사기를 썼다.

효종 10년(1659년) 영천군수 25세 호연(浩然) 권성원(權聖遠-시중공파 화천군(花川君)5대손)이 태사공 신도비 수갈을 발의하여 석역소를 설하고 풍기에서 7척의 돌을 벌채하여 외손 이인(李土寅)이 도왔으나 호연공이 한성서윤으로 부임해 중단되었다가 현종 4년 호연이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재착수하였는데 하세하니 24세 권정(鋌)과 심(淰) 입석하였다.
신도비문은 현종 2년 한성우윤 탄옹 권시(權諰)가 짓고 글씨는 외손 이조참의 이경휘(李慶徽)가 썼으며 두전(頭篆)은 외손인 사헌부 장령 허목(許穆)이 썼으며 음기는 외손 예조참판 조복양(趙復陽)이 짓고 병조판서 외손 김좌명(金佐明)이 썼다.

현종 2년(1661년) 24세 탄옹 권시(權諰)가 지은 태사공 신도비문에는 21세 영의정 권철(權轍)이 관찰사가 되어 위토를 마련하였다.

숙종 3년(1677년) 12월 능동재사에 각파 대표가 참석하여 종약을 제정하고 족회(族會)를 설하였다.

숙종 8년(1682년) 경상감사 시경(是經)이 상석을 개조하고 향로석, 문관석, 망주석 등을 세웠으며 재사가 협소하므로 누각을 세우기로 하여 1684년에 7간의 누각을 준공하니 위층에 1백인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 좌우 곳간을, 중앙에 통로를 만들고 재사 동쪽에 3간 신주(神廚)를 세우고 담장을 두르니 곧 추원루(追遠樓)이다. 능동실기 신도비각 중수기에 안동부사로 재임 중인 26세 유회당 권이진(權以鎭)이 신도비각을 세우고 영조 1년(1725년) 경상감사로 와 족회를 베풀었다.

숙종 40년(1714년) 유성연이란 사람이 시조 묘소 용미(龍尾)에서 큰 나무를 베니 권문과 유씨간에 오랜 송사를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안동부는 “태사공 묘도의 국내는 권문에서 주관해야 마땅하며 유문 선영이 태사공 묘소 앞에 있으나 이는 외손으로 부장되어 있으므로 태사공의 묘산은 권문과 힘을 합쳐 수호하여 초목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영조 18년(1742년) 유문에서 능동재사의 수묘군(守墓軍) 승도(僧徒)를 모두 내쫓고 점거하는 사변이 일어났는데 안동부에서 해결이 안되니 권이성을 대표하여 한성부에 정문을 냈다. 비변사에서는 제사를 내려 “태사의 묘도를 수호하는 절목은 타인이라도 공경하고 삼가는 여지가 없거늘 추로지향(鄒魯之鄕)을 돌보지 않아 이 같은 행위가 자행된다니 실로 지극히 한심하다. 방자한 짓이라 규정하고 법으로 다스리라” 하였다.

영조 22년(1746년) 경상감사 시중공파 28세 권혁(權爀)이 다시 세웠다.

영조 29년(1753년) 능동재사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나 건물이 전부 소실되었다.

정조 20년(1796년) 언덕에 보판각을 건립하였는데 이는 후 갑인보 목판을 보존키 위해 세운 것이고 순조 26년(1826년) 중건하고 고종 33년(1896년) 이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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